두문불출하는데 뚜벅뚜벅 찾아오는 이의 발소리마저도 끊기고
두문불출하는데 뚜벅뚜벅 찾아오는 이의 발소리마저도 끊기고
  • 황미숙
  • 승인 2013.05.13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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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이제현 (李齊賢)

이제현 (李齊賢, 1287~1367)은 고려시대의 문신 ·학자로서 본관은 경주(慶州)며 자는 중사(仲思)이고 호는 익재(益齋) ·역옹·실재(實齋) 등이다. 초명은 지공(之公)이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했고,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도입해 유행시켰다. 또한 그는 탁월한 유학자로 성리학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시는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루면서도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관계되는 충효사상·관풍기속(觀風記俗)·현실고발의 내용과 주제도 담고 있는데 영사시(詠史詩)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산문은 앞 시대의 형식 위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내용을 위주로 한 재도적(載道的)인 문학을 추구했다. 공민왕 묘정에 배향, 경주의 귀강서원과 금천의 도산서원에 제향됐다. 저서에 《효행록(孝行錄)》·《익재집(益齋集)》·《역옹패설》·《익재난고(益齋亂藁)》 등이 있다.
이제현이 살았던 고려 시대의 시대는 최씨 정권이 확립돼 있던 시기로 국가적으로 몽고의 압박을 받아 커다란 시련을 겪을 때이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중엽에 이르는 원 간섭기에는 국가 위신의 손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대의 문인들은 이 수난을 겪으면서 결정적인 성장을 하게 됐다.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반몽개혁 의지를 담은 많은 사서와 민족의식을 높일 수 있는 역사책들이 편찬됐다. 또한 고려 문화는 원나라와의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한층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다. 무엇보다도 성리학의 수입은 무인집권시대에 위축됐던 유교문화를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시기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이제현은 그 시대 문장가이자 정치가로서의 생애를 했던 것이다. 누구보다 나라에 대한 걱정도 컸을 것이며 염려스런 마음은 고스란히 자신의 작품에 묻어져 나왔을 것이다. 《역옹패설》 역시도 그러한 작품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나 짐작하게 한다.
이제현은 수필집이라 할 수 있는 《역옹패설》을 짓는 이유를 그 서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正壬午에 이르러, 여름비가 달을 이어 내리니, 두문불출하는데 뚜벅뚜벅 찾아오는 이의 발소리마저도 끊기고 무료함을 달랠 길이 없어, 연적을 들고 가서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물을 받아다가, 친구들끼리 주고받은 접는 편지를 엮어서, 기록한 것을 만나는 대로 편지 뒤에 썼고, 그 끝에다가 적기를, “역옹패설”이라 했다. 그 역에 락(樂)을 붙인 것은 그 음(音)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역, 상수리 나무)은 재목으로 쓰이지 않아 해를 멀리할 수 있어, 나무에 있어서는 즐거워할 만한 것이 되니 그래서 락(樂)을 붙인 것이다. 나는 일찍이 대부(大夫)의 뒤를 쫓아 스스로 해를 면해 졸박함을 길렀으니, 그래서 역옹이라 호(號)한 것이며 그 역(역, 상수리 나무)의 재목이 되지 않아서 장수할 수 있음을 바라는 것이다. 稗(패)에 卑(비)를 붙인 것은 그 소리 때문이지만, 그 뜻으로 본다면, 곡식 종류로는 가장 비속한 것이다. 나는 어려서 책을 읽을 줄 알았고, 커서는 그 학문을 그만두었고, 이제는 늙어버렸으나, 도리어 잡박한 문장을 짓기를 좋아해서 내실이 없고 비속하니, 稗(패, 곡식의 한 종류인 피)와 비슷하다. 그래서 그 기록한 것을 이름해 ‘패설(稗說)’이라 했다.
또한 《익재난고》의 〈산중설야(山中雪夜)〉 시(詩)에서 “종이 이불에 찬 기운 생기고 불등은 어두운데(紙被生寒佛燈暗), 사미는 한밤 내내 종을 치지 않는다(沙彌一夜不鳴鍾). 아마 성내리라 자던 손이 일찍 문을 열고서(應嗔宿客開門早), 저 암자 앞의 눈 덮힌 소나무 보려는 것을 (要看庵前雪壓松).” 눈 내리는 밤 절집에서 이제현은 서걱서걱한 종이를 솜 인양 둔 이불 냉기가 이내 밤잠을 설치게 했나보다. 소나무에 내리는 눈 오는 소리는 스님조차 깊은 잠을 들게 했건만 천하에 하얗게 눈 덮인 새벽 아침 콧 끝에 스치는 맑은 공기가 그림같이 보인다. 잠들지 못하는 밤 홀로 깨어 깊은 암자에서 마음을 설경으로 다스리려 한다. 어쩌다가 암자에 하룻밤을 의탁했으나, 고단한 심경을 마침 내려주는 눈 오는 소리에 빼앗기고 말았구나. 꽃비 내리는 계절 좋은 이들과 담소 나누며 산보라도 하면 어수선한 마음 달래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