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씨(王氏)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李家)의 신하는 될 수 없다
왕씨(王氏)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李家)의 신하는 될 수 없다
  • 황미숙
  • 승인 2013.05.0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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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고려 말, 두문동 선비 성사제(成思齊)

성사제(成思齊)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정승 성유득(成有得)의 아들로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과 문형(文衡)을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자 만수산(萬壽山)에 은거한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 사람이다.
김굉(영조15~순조16)의 《귀와집 (龜窩集)》에는 〈고려직제학성공실기서(高麗直提學成公實紀序)〉가 포함 되어있다. 이 글은 1809년(순조 9)에 3권 1책으로 간행된 〈두문동선생실기(杜門洞先生實記)〉에 실려 있으며, 본서에서의 제목과는 달리 跋文으로 되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두문동 성사제 후손 상사 이긍(孝兢)이 실기를 가지고 와서 발문을 부탁하여 짓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두문동선생실기〉는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에 관한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성사제는 정치가 혼란해지자 사직, 10여 년간 은거했는데 결국 고려가 망하자 유신(遺臣) 71인과 함께 만수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 만수산은 뒤에 두문동(杜門洞)이라 칭해졌다. 만수산에 들어가기 전 조선으로부터 부름을 받자 ‘왕씨(王氏)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李家)의 신하는 될 수 없다(寧爲王氏鬼, 不作李家臣)’이라는 시(詩)를 지어 그의 굳센 뜻을 보였다고 한다.
〈두문동선생실기〉책판은 현재 물계서원에 조선시대 목판 형태로 소장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책판들은 창녕성씨 관계 문적을 새긴 것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은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에 있는 서원으로 창녕성씨(昌寧成氏) 시조 성인보(成仁輔)의 아들 성송국(成松國)을 비롯하여 성사제등 문중 21현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향하고 있다. 1710년(숙종 26) 창효사(彰孝祠)로 창건하였고 1719년 세덕사(世德祠)로 개칭하였다. 1729년(영조 5) 지역 유림의 건의로 물계서원으로 편액하였다. 1866년(고종 3) 조령(朝令)에 따라 철거되었으나 1995년 복원하였다.
성사제는 두문동에 들어가기 전에 부인 성산이씨에게 “나는 고려의 신하라 신조[조선]에 벼슬해서 조상을 욕보이지 않을 것이고 이제 곧 죽을 것이라며 아들을 데리고 고향(창령)으로 돌아가서 선영을 지키라”고 하였다. 부인과 아들[두(杜)]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내가 죽더라도 시체를 염하지 말 것이며, 봉분도 만들지 않음이 옳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아들 이름을 ‘두(杜)’로 바꾼 것에서도 그의 단심(丹心)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조선 정조 때 유생들에 의해 성사제의 존재가 다시 부각되고 순조8년(1808)에는 개성 표절사에 그의 이름이 뒤늦게 오른다, 그 뒤 고종 10년 (1873)에 ‘정절공(貞節公)’이란 시호를 받는다. 훗날 후손들이 경남 창녕군 대지면에 ‘고려충신성사제신도비’를 세워 그 정절을 기리고 있다.
《논어》 이인(里仁) 편에서 증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뿐이다.(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참(參, 증자)아, 우리 도(道)는 한 가지 리(理)가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하시니, 증자께서 “예”하고 대답하였다.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門人)들이 “무슨 말씀입니까?”하고 물으니, 증자께서 대답하였다. 즉, 자기 자신을 다하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자기를 미루어 남을 생각 하는 것을 서(恕)라 한다. 논어를 한마디로 대변하는 글귀일 것이다.
공자의 말보다 증자의 해석이 더 확실하게 들린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 이들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는가.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멋대로 자신의 논리에 꿰어 맞추는 것은 아닌가. 선무당 짓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게다가 잔재주까지 부려가며 정치적 발언을 일삼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의 몫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대부는 머리를 숙이고, 하대부(下大夫)는 등을 숙이고, 상대부(上大夫)는 허리를 숙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뜻을 세우기 위해서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