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두려워 하는 벗
내가 두려워 하는 벗
  • 황미숙
  • 승인 2013.04.29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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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고려 말, 두문동 선비 조의생(曺義生)

두문동(杜門洞)은 고려가 멸망하자 성거산 서쪽에 고려의 신하 72명이 살던 곳이다. 이들 중 맹호성, 조의생, 임선미를 두문삼절(杜門三絶)이라 부른다. 우리는 “두문” 또는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두문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표현은 이미 기원전 90년에 완성된 사마천의 《사기(史記)》〈상군열전〉에도 나오고, 644년 당 태종 때 편찬된 역사책 《진서(晉書)》에도 나온다. 더구나 ‘문을 닫다’는 뜻인 “두문(杜門)”은 《주서(周書)》·《위서(魏書)》·《한서(漢書)》 등 여러 곳에 나타난다.
조의생(曺義生)의 생몰년은 미상이며 자 경숙(敬叔)이다. 고려 말기에 충절을 지킨 문인이다. 부친은 개성부윤을 지낸 조인(曺仁)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행동에 절개가 있었다. 언론(言論)이 동료들 중에서도 특출했다고 전한다. 20여 세의 약관의 나이로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웠다. 학식이 뛰어나 정몽주는 그를 칭해 “내가 두려워하는 벗”이라고 했다. 고려가 망하자 임선미(林先味) 등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 조선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죽었다.
조선 영조 때에 특히 두문동비(杜門洞碑)를 세우고, 유수(留守)를 보내어 치제해 어제 어필 “승국勝國)의 충신(忠臣)은 이제 어디에 있는고, 특히 그 동(洞)에 그 절(節)을 표한다.(勝國忠臣今焉在 特竪 其洞表 其節)”이라고 했다.
조선을 건국되자 고려 유신들 중 72명이 ‘불사이군(不事二君)’ 즉, 충직한 신하는 결코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충절을 맹세하고 숨어든 곳이 개성의 ‘두문동’ 이었고, 여기서 이성계의 회유가 집요해지자 다시 이를 피해 일부가 흩어져 숨어든 곳이 강원도 정선 땅이었다. 이때 온 이들이 7인이었고, 그래서 이들이 머문 곳을 후세에 ‘거칠현동’이라고 부르게 됐다. 이들은 매일 아침 관복을 옛 궁궐 쪽에 걸어 놓고, 중국의 백이숙제의 고사(故事)처럼 서운산(瑞雲山)의 고사리와 산나물을 캐 먹으며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그리고 이웃 여주의 목은 이색이나 원주의 원천석과 같은 이들과 회한을 나누며 자신들의 처지를 한시로 지어 부른 것이 인근에 풀이돼 전해져 정선아라리가 됐다는 것이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 막 모여 온다.” 여기서 눈이나 비가 오려는 암울한 상황은 고려 말의 국운을 말하는 것이며, ‘만수산’이란 옛 도읍지인 개경의 주산을 말한다는 것이다. 정선아리랑 첫머리의 노랫가락이 두문동 선비들의 마음과 같았을까. 아니면 억측 일까. 절의를 지키고 살다간 이들의 자료가 빈약하다. 사료에 의거해 글을 쓰는 역사가들에게는 늘 빈약한 자료 타령이다.
《사기(史記)》 <전단열전(田單列傳)〉, 기원 전 3세기 연(燕)나라의 장수 악의(樂毅)가 제(齊)를 정벌했을 때 이야기다. 제나라의 화읍(畵邑)에 왕촉(王燭)이라는 현자가 산다는 소문을 듣고 악의는 화읍 주변 30리 안으로 진군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귀순하면 장수로 임명하고 1만 가구를 봉(封)하겠노라 제의했다. 이때에 왕촉이 거절하자 화읍 사람을 학살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왕촉이 한 말이 ‘忠臣不事二君 貞女不更二夫’ 이다.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목을 매었다 한다. “제나라 왕이 나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아 관직에서 물러나 농사지으며 살았다. 나라가 이미 망했는데 내가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나를 병력을 몰고 와 장수가 되라 협박하는데, 이는 폭군 걸왕(桀王)을 돕는 일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살아서 의로움이 없을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것을 먼저 배우는 것에만 앞장서고 등용되고 편하게 안전한 것이 전부인 듯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