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
  • 황미숙
  • 승인 2013.04.2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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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고려 말, 두문동 선비 임선미(林先味)
“두문동 이야기”에 대한 역사 기록으로는 《영조실록》16년(1740) 9월 1일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가 망한지 35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임금이 이르기를, “부조현(不朝峴)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명명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하니, 주서 이회원이 아뢰기를, “태종께서 과거를 설행했는데, 본도(本都,송도·개성)의 대족(大族) 50여 가(家)가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또 그 동리를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했습니다[且杜門不出 故又以杜門名其洞].”했다.

임금이 부조현 앞에 이르러 교자(轎子)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졌는데 이제 ‘부조현’이라고 명명했다는 뜻을 듣고 나니, 비록 수백 년 뒤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해금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마음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

”하고, 이어 승지에게 명해 칠언시 한 구를 쓰게 하니, 이르기를,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 [勝國忠臣勉繼世]’ 했다.

임선미(林先味)는 생몰년이 미상이다.

자(字)는 양대(養大)요. 호(號)는 휴암(休庵)이며 본관은 평택(平澤)이다.

전라북도 순창군 인계면 갑동리에 소재하고 있는 호계사는 고려 말 충신 임선미(林先味)의 애국충절과 부모에 대한 효 정신을 후손에 길이 귀감이 되도록 세워진 사당이다.

여기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임선미는 우리 역사에 남아 있듯이 고려 말에 뜻을 같이 한 71인과 함께 오정문(午正門)에 숨어 고려 충신의 절개를 꺾이지 않았다.

이가 곧 두문동 72인 중의 한 사람이다.

효성이 지극해 고려 말 조정 충신들이 부모 복상(服喪)기간의 단축론에 대해 동료인 박상충(朴尙衷)등과 합세해 완강히 반대주장을 내세운 강직한 성품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선생은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누차 불렀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단심을 보이자 조선 태조는 그 곳에 불을 질러 71인과 같이 타 죽게 됐다.

임선미와 조의생은 앞장서서 부조현(不朝峴)을 넘어 두문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 초막을 짓고 두문불출했다.

이성계는 이들을 불러내려고 부조현이 건너다보이는 경덕궁(敬德宮)에서 과거를 보게 했는데, 두문동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이성계는 두문동에 불을 놓았고, 그 불길에 모든 이들이 물러설 줄 알았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임선미, 조의생 그리고 맹호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무너진 고려와 운명을 함께했다.

훗날 두문동비와 부조현비가 세워진 것도, 표절사와 두문동서원이 세워진 것도 이들의 저항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선미가 순절했을 때의 나이가 33세였다.

그리고 그가 쓴 글도 그에 관한 기록도 하나 남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그의 행적이라곤 태학생 신분으로 두문동에 든 것과,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정몽주나 박상충(朴尙衷)처럼 3년 시묘를 선구적으로 행했던 것만 전할 뿐이다.

그 후 충절에 감동돼 1751년(영조7년)에 비각을 세워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선생의 뜻을 추모하게 됐다.

다시 1783년(정조7년)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제사를 지내 오다가 1868년(고종5년)에 비각이 철회됐으나 그 후 전국 유림의 주선으로 전남에 있는 만수산(萬壽山) 아래에 경현사(景賢祠)를 세워 추모해 오다가 일제강점기에 다시 철회를 당하고 말았다.

후손들이 위패를 자기 집에 봉안하고 있던 중 해방 이후 순창군 향교유림들의 주선으로 사우(祠宇)를 호계사라 명하고 해마다 음력 3월 17일에는 유림과 후손들이 모여 선생의 충절과 덕의를 추모하고 있다.

《맹자》 이루장에서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반성해(君子 必自反也), 내가 반드시 충성되지 못함이다 하나니(我必不忠). 자기 스스로 반성해 충성해도(自反而忠矣), 그 사람의 무례함이(其橫逆) 마찬가지면(由是也), 그때는 군자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또한 망령된 사람일 뿐이다 할 터이니(君子曰 此亦妄人也已矣). 이처럼 된다면(如此則) 금수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與禽獸奚擇哉)”했다.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갖는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보여준다.

두문동에서 나오자 않은 것으로 우리는 추앙해야 하는가. 아마도 그들의 충절은 이성계에게 자신을 돌이켜 보기를 원했던 것은 아닌가. 그러면 나 자신도 돌이켜 보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끊임없이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끔씩은 내 주변에 누가 있는가도 살펴봐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