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엔 동포였다가 저녁엔 원수가 되는 것을
아침엔 동포였다가 저녁엔 원수가 되는 것을
  • 황미숙
  • 승인 2013.04.0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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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고려말의 유학자,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이숭인(李崇仁, 1347년~1392년)의 호는 도은(陶隱), 자는 자안(子安), 본관은 성주이며, 길재 대신 삼은(三隱)으로 꼽히기도 한다.

포은 정몽주의 문하생이었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예의 산랑(禮儀散郞)·예문 응교(藝文應敎)·문하사인(門下舍人)·숙옹부승 등을 역임했다.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창(改創)한 뒤 정몽주 등과 함께 학관(學館)을 겸했다.

고려 문사(文士)를 뽑아 명나라에 보낼 때 1등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어려 가지 못했다.

정도전 등과 함께 원나라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유배된 적이 있다.

그 후 정몽주와 함께 실록을 편수하고, 1386년(우왕 12)에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인임의 인족(姻族)이라 해 유배되기도 했다.

1389년 창왕 때에도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에도 혼란기를 맞아 유배·감금됐고, 1392년(공양왕 4) 이방원에게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됐다.

조선이 건국되자 정도전의 사주를 받은 황거정에게 고의적 장형으로 살해됐다.

《태조실록》의 이숭인의 졸기(卒記)에서 “직강(直講)에서 판서(判書)에 이르기까지 모두 제교(製敎)를 겸무(兼務)해, 이색이 병들고 난 뒤에는 중국과의 외교에 관계되는 문자(文字)는 모두 그 손에서 만들어졌다.

”라고 했다.

이숭인에 대해 이색은 “우리 동방의 문사 가운데 도은에 비견할 만한 이가 드물다.

”라고 칭찬했고 정몽주(鄭夢周)는 “목은을 이어 홀로 문장을 천단하니, 찬연한 별들이 가슴속에 벌여 있는 듯하다.

”라고 했으며, 권근(權近) 역시 “고려의 문헌 가운데 세상에 이름난 것으로 목은의 성대한 시문과 도은의 우아한 시문만 한 것이 없다.

”라고 했다.

특히 후대의 최립(崔?)은 “목은 이색의 문장과 도은 이숭인의 시가 우리 동방의 시문 가운데 으뜸이다.

”라고 해 이숭인의 시의 가치를 한층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도은 이숭인은 문장가, 특히 시인으로서 후세에 알려졌다.

이숭인은 고려 말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중시되던 상황에서 그가 필요했다.

그는 36세에 공민왕의 시호를 청하는 〈청시표(請諡表)〉를 작성해 정몽주를 통해 명나라에 보냈으며, 37세에는 명나라의 오해를 풀기 위해 표문을 작성했다.

당시 명나라는 공민왕 시해 사건, 고려인 김의(金義)가 명나라의 사신 채빈(蔡斌)을 죽인 일, 명나라의 사신 손 내사(孫內史)가 자살한 일, 경절(慶節)을 축하하러 오는 고려 사신들이 늦게 입조한 일, 그리고 명나라가 정한 많은 조공을 고려가 5년 동안 바치지 않은 일에 대해 날카롭게 추궁하고 있었다.

이에 이숭인이 〈진정표(陳情表)〉와 〈하절일표(賀節日表)〉를 작성하고 뒤에 정몽주가 가서 해명하자 명나라 황제는 고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됐다.

뒷날 이숭인이 정치적으로 탄핵을 받았을 때 권근이 ‘명나라에 보내야 할 수많은 금과 은, 말, 베 등을 면제받게 된 것은 오로지 이숭인의 문장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고 변호했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이숭인전(李崇仁傳)을 보면, 백거마는 명나라 남경에서 장사하기 위해 상당한 수량의 금,은(金銀)을 준비하고 떠났는데, 1388년 10월에 남경에 도착해 거래를 막 시작하려던 백거마는 이숭인으로부터 금,은의 판매수량을 제한 당하게 되자 앙심을 품게 됐다.

그래서 그는 귀국해 사신(使臣) 이숭인이 남경에서 사적으로 무역 활동을 한 사실을 소문내어 항간에 떠돌게 했고 결국 간관(諫官) 오사충(吳思忠) 등은 그 소문을 접하게 됐다.

오사충 등은 창왕에게 상소를 올려 이숭인을 탄핵했고 이숭인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는 처지로 몰리고 말았다.

이숭인의 시(詩) <오호도(嗚呼島)> 끝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 앞으로 천년 만년이 지나도록 (嗚呼千秋與萬古), 한 맺힌 이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랴 (此心?結誰能識), 뇌정이 돼 이 한을 풀지 않는다면 (不爲轟霆有所洩), 긴 무지개 돼 하늘을 붉게 쏘리라 (定作長虹射天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고금의 수많은 경박아들이 (君不見古今多少輕薄兒), 아침엔 동포였다가 저녁엔 원수가 되는 것을 (朝爲同袍暮仇敵)” 고려 말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살다가 이숭인의 시(詩)의 내용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울림을 준다.

오늘은 아군, 내일은 적군 그리고 다음날에는 무엇이 될지 모를 일이다.

나 또한 다를 것이 없는 속물이고 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서로가 필요로 할 때 의기투합하고, 주고받을 것이 없으면 아무런 존재가치가 없는 세상살이에서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신뢰하고, 누구와 마음을 나눌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