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우물을 길으려니 두레박줄이 짧구나
옛 우물을 길으려니 두레박줄이 짧구나
  • 황미숙
  • 승인 2013.04.0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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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고려말의 유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
이색(李穡, 1328년(고려 충숙왕 15)~1396년(조선 태조 5))의 본관은 한산이고,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리학을 조선에 소개,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했다.

이색은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 1298~1351년)의 아들이다.

그는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부정적으로 보고 협조하지 않다가 의문의 최후를 맞이한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이곡은 시문에 능해 국내는 물론 멀리 원나라에까지 명성을 날렸다.

그는 일찍 원나라의 과거시험에 합격하어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원나라의 많은 학자들과 친밀히 사귀고 문화를 교류했다.

후에 귀국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됐다.

이곡은 높은 시적흥미를 갖춘 유학자였다.

때문에 정도전(鄭道傳)은 이곡을 ‘대유학자 이제현의 후계자“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색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배우기에 힘썼으며 글재주가 능숙하고 성질이 강인하고 매사를 처리함에 있어서 매우 세밀해 빈틈이 없었다고 한다.

《고려사》 열전에서는 이색이 ‘그의 성격이 모난데가 없다’고 평했다.

충목왕 4년(1348) 이색은 아버지를 따라 원나라에 왔다.

그때 그의 나이는 20살이었다.

아버지 이곡은 원조중앙에서 중서사전부라는 벼슬자리에 있었고 이색은 원조조정의 관원이었으므로 예(禮)에 따라 국자감(國子監) 생원(生員-학생)이 돼 연경(燕京:북경)에서 《주역학(周易)》으로 유명한 우문 자정에게서 《주역》을 배웠다.

얼마 후 이색은 글 한편을 지어 들고 자정을 찾아갔다.

이색의 역의일편(易義一篇)을 받아본 자정은 매우 감탄했다.

주역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는 이색이 이처럼 이해력이 높고, 깊은 연구가 있는데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부터 자정은 정성껏 주역을 이색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색이 국자감에서 공부할 때 그의 성적은 높고 재주가 뛰어났다.

원조문사 구양현이란 사람은 이색에게 ‘짐승의 발굽과 새발의 자취가 중국의 길에서 사귀였구나’라고 빈정거렸다.

그러나 이색도 이에 지지 않고 닭의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사방에서 퍼지는구나했다.

구양현은 이색이 자기의 빈정거림을 ‘닭의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에 비유하자 약이 올랐다.

이번에는 ‘잔을 들고 바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바다가 넓다는 것을 아는구나’라고 했다.

이에 이색은 ‘우물 속에 앉아 하늘을 보고 하늘이 작다고 하는구나’라고 했다.

구양현은 자기가 갈데없이 ‘우물 안 개구리’꼴이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색의 놀라운 문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부터 두 사람은 서로 격려하면서 학업에 더욱 힘썼다.

이색은 평양 영명사(永明寺)를 다녀오다가 부벽루에 올라 감회가 깊은 시를 남겼다.

“어제 영명사를 들렀다가 (昨過永明寺), 잠시 부벽루에 올랐었네 (暫登浮碧樓), 텅 빈 성엔 한 조각 달이요 (城空月一片), 예스러운 돌엔 천추의 구름이로다 (石老雲千秋), 기린 말이 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麟馬去不返), 천손이 어느 곳에서 노니는고 (天孫何處遊), 길게 읊으며 바람 부는 언덕에 서니 (長嘯倚風?), 산은 푸르고 강은 절로 흐르누나 (山靑江水流)” 이색의 시를 읽은 중국의 허영양은 동국(東國, 고려)에 이러한 시를 짓는 사람이 있는가하며 놀라운 일이라고 경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1392년 정몽주가 처단될 때 이색도 연루됐다.

이성계는 이색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대의 두 아들이 조정에 죄를 지었으니 그대도 떠나라. 동서 두 강 밖에서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라’라고 했다.

이색은 내가 땅이 있나 집이 있나 어디로 가느냐며 맞서자, 이성계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이색을 금주로 귀양을 보냈다.

또 여흥(麗興)으로 옮겼다가 그 후에 석방됐다.

두 아들을 잃고 유랑했던 이색은 1396년 69세 때 여강으로 가던 도중에 사망했다.

《가정집서(稼亭集序)》에서는 이색은 학문을 아버지 이곡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그러나 이색은 사실상 원나라 국자감에서 《정주학》을 배우고 깊이 연구했고 귀국한 후 많은 학자들과 사귀고 학문을 담론하는 가운데서 그리고 고려 말, 조선초기의 복잡한 사회실천 가운데서 학문을 닦았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학문수준을 훨씬 능가했다.

특히 아버지와 아들이 대유학자라는 면에서 문자 그대로 ‘학문의 일가’를 이루었다고 평해도 손색이 없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학문의 대가를 이룬 이색. 그러나 그는 사회의 격랑 속에서 두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부자는 삼대를 가기가 어렵다고 했다.

무엇이든 얻는 것보다 지켜 가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대대로 부자로 재벌로 살아가는 이 땅의 그들은 무엇인가. 과연 지킬 것은 지켜가며 자자손손 살아간다는 것인가. 그러나 자신을 지킨다며 두 아들을 대신 잃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도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제 한 몸 지키기 위해 무고한 희생자를 솔선수범해서 만들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