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작을 그만두고 천작을 얻으니(自從人爵生天爵)
인작을 그만두고 천작을 얻으니(自從人爵生天爵)
  • 황미숙
  • 승인 2013.03.25 14: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9. 고려 말의 유학자·동방(東方)의 천자(天子), 백이정
우리는 대개 조선의 성리학의 출발을 고려의 유학자 안향으로부터 시작됐다고 여긴다.

그러나 안향에 뒤지지 않는 유학자 백이정이 있다.

백이정(1247(고종 34)~ 1323(충숙왕 10))의 본관은 남포(藍浦). 자는 약헌(若軒), 호는 이재(彛齋)이다.

아버지 백문절(白文節)은 고려 고종(高宗) 때에 과거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국학 대사성(國學大司成)에 이르렀는데, 문사(文詞)가 풍부해 붓만 대면 문장을 이루어서 당대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백이정은 타고난 자질이 재상이 될 만 하다고 했는데, 여러 관직을 거쳐 첨의평리 상의도감사(僉議評理商議都監事)에 이르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당시 정(程子)·주(朱子)의 학문이 비로소 중국에 행해지고 아직 우리나라에는 미치지 않았을 때, 백이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이를 배우고 돌아오자, 이제현(李齊賢)과 박충좌(朴忠佐)가 맨 먼저 스승으로 섬겨 그의 학문을 이어받았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기록하고 있다.

고려후기 불교계는 불교교단에 대한 비판운동으로 정혜결사나 백련결사와 같은 신앙 결사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신앙결사가 이룩했던 불교 정화운동은 원 간섭기에 들어서면서 다시 귀족화, 보수화 돼가면서 심각한 타락에 직면했다.

특히 대농장과 노비를 소유하며 국가재정을 어렵게 만드는 폐단을 가져왔다.

이로 말미암아 불교를 대신할 새로운 사상의 도입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을 인식한 일부 유학자들은 원나라로부터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의 수입·보급에 관심을 갖게 됐다.

안향은 교육 진흥을 위해 섬학전(贍學錢)과 국학(國學)의 대성전(大成殿)을 신축했고, 박사(博士)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 공자(孔子)와 칠십자(七十子)의 화상(畵像)과 제기·악기·6경·제자사(諸子史)의 서적을 구해오게 했다.

당시 원(元)나라에서는 남송(南宋) 때 일어난 성리학이 세조(世祖)의 유교숭상 정책 이후 급속히 보급돼 발전하고 있었다.

백이정은 1298년 8월 충선왕이 원나라로 불려갈 때 따라가 수도인 연경(燕京)에서 약 10년 동안 머무르며 성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정주학(程朱學)을 연구했다.

그 후 고려에 들어올 때 정주의 서적과 《주자가례》를 가지고 와 이제현·박충좌 등에게 전했다.

안향이 주자학 도입에 힘썼다면, 백이정은 주자학의 기초를 세우고 많은 문인을 배출해 고려 말 주자학을 심화·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성리학 연구와 제자육성에 힘씀으로써 동방(東方)의 천자(天子)라는 찬양을 받기도 했다.

《고려사》 〈백문절부 이정전〉에 또한 백이정이 정주학을 수입했다는 것을 적고 있다.

안향, 백이정, 권보, 우탁, 이제현 등으로 이어지는 13세기말~14세기 중반이 성리학 초기 수용기였다.

충목왕 즉위년(1344년)에는 성리학의 핵심 텍스트인 사서(四書)가 과거 시험과목으로 채택됐다.

초기 성리학의 맥은 다시 이곡, 이색 부자(父子)와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등으로 이어져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이루었다.

성리학 초기 수용자들 대부분은 과거 급제자들이었다.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갈고 닦은 학문 실력으로 관계에 진출한 것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권문세족 출신이 아니었다.

무신정권 붕괴(1270년) 이후 새로이 떠오르는 가문 출신이었다.

본관도 대부분 충청, 전라, 경상 등 삼남(三南) 등에 있었다.

백이정의 묘소는 보령군 웅천면 평리 양각산(羊角山)에 있으며 그곳에 그를 모신 신안사(新安祠)와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그리고 《동문선》에 백이정의 시 ‘연거(燕居)’가 전해지고 있다.

“쓸쓸한 작은 집은 십주 남짓한데(矮屋蕭條十餘), 향 사르고 고요히 성인의 글 읽누나(焚香靜讀聖人書), 인작을 그만두고 천작을 얻으니(自從人爵生天爵), 정욕은 가을 수풀이 날로 점점 떨어지듯(情欲秋林日漸疏)”. 맹자의 말에, “천작(天爵)이 있고 인작(人爵)이 있으니, 인의충신(仁義忠信)은 천작이요, 공경대부(公卿大夫)는 인작이다.

옛사람은 천작을 닦으면 인작이 따라왔다” 했다.

그러나 오늘날 공경대부들이 조용히 성인의 글을 읽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어쩌면 성인의 글을 읽고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구절만을 외우고 쓸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를 일이다.

‘문맹’은 글을 읽지 못하고 쓸 줄 모른다는 것이 아니고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읽을 줄 알고 쓸 줄 아는 것은 유치원생들도 하는 일이다.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양 제 눈을 찌르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한다.

오늘 하루를 버티어야 내일 먹을 꿀단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