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사서 왕비가 되다
꿈을 사서 왕비가 되다
  • 황미숙
  • 승인 2013.03.1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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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부인, 김문희(金文姬) [문명황후(文明王后)]
신라시대 김유신(金庾信)의 누이 문희(文姬)가 언니인 보희(寶姬)로부터 꿈을 사서 김춘추(金春秋), 즉 태종무열왕의 비(妃)가 됐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화랑세기≫에서 전할 만큼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다.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條)에 훈제부인(訓帝夫人)으로 돼 있으며, 문명왕후(文明王后)는 시호인데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寶姬)가 꿈에 서악(西岳 : 경주 서악)에 올라 오줌을 누었는데, 흘러서 서울에 가득 찼다.

아침에 아우에게 꿈 이야기를 했는데 문희가 듣고 말하기를 “내가 그 꿈을 사겠습니다”라고 했다.

언니가 말하기를 “무엇을 주겠느냐?”라고 하니, 문희가 말하기를 “비단치마면 되겠습니까?”라고 해, 언니가 “좋다”고 했다.

동생이 옷깃을 벌려 받았는데, 언니가 말하기를 “어젯밤 꿈을 너에게 준다”라고 하니 동생은 비단치마로 값을 치렀다.

후에 10일이 지나 김유신이 김춘추와 더불어 정월 오기일(午忌日)에 김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蹴鞠 : 신라 때의 축국은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이른다)을 하다가 고의로 김춘추의 옷을 밟아 옷끈을 떼어버리고 말하기를 “청컨대 우리 집에 들어가서 꿰맵시다”라고 하니 김춘추가 그 말을 따랐다.

김유신이 아해(阿海, 보희의 아명)에게 명해 꿰매드리라고 하니, 아해가 말하기를 “어찌 작은 일로써 귀공자를 가벼이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사양했다.

이에 아지(阿之, 문희의 아명)에게 명했더니 이로부터 자주 왕래했다.

김유신이 그의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어 말하길 “네가 부모님께 고하지 않고 임신을 했으니 어찌된 일이냐?”라고 하고, 이에 온 나라 안에 말을 퍼뜨리고 누이를 태워 죽인다고 했다.

어느 날 선덕왕이 남산에 행차하는 것을 기다려, 뜰 가운데 땔감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자 연기가 일어났다.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가 아뢰기를 “아마도 김유신이 그의 누이를 태우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그의 누이가 남편도 없이 임신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이 누구의 짓인가?”라고 했는데, 마침 김춘추가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안색이 크게 변했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공이 한 일이니 가서 구하시오”라고 했다.

김춘추가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해 이를 막고, 그 후 혼례를 치렀다.

그런데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보면, 김춘추는 당시 본부인인 보량궁주(寶良宮主)가 있어서 문희를 부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김유신이 문희를 태워 죽이려고 하자 선덕공주가 연기를 보고 김춘추로 해금 그 목숨을 구하게 했다는 것이다.

문희는 얼마 뒤 보량궁주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정실부인이 됐다.

이 기록에 따라 당시 선덕여왕의 신분이 ≪삼국유사≫의 기록과 달리 여왕이 아니라 공주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의 선덕왕(善德王) 즉위년은 632년이므로, 김춘추와 김문희의 혼인에 선덕왕이 관여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설화적인 내용일 뿐 실제로 두 사람의 혼인이 이루어진 시기는 선덕왕대가 아닌 진평왕 48년(626) 이전으로 보아야 한다.

김유신이 풍월주가 된 것은 18세 때였다.

외할머니 만호태후의 후광으로 풍월주가 되기는 했지만 가야 출신이라는 이유로 신분상승에는 제약이 있었다.

가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김유신은 누이동생을 왕족인 김춘추에게 시집보내는 모험을 했다.

망국 가야의 왕손으로 새로 신라의 진골로 편입된 김유신 계통의 김씨(金氏)들을 가리켜 이른바 ‘신김씨(新金氏)’라고 불렀다.

신김씨들은 선덕공주의 튼튼한 방패가 됨으로써 그녀의 여왕 즉위에 큰 힘이 돼주었다.

그리고 진덕여왕이 죽고 진골인 김춘추가 뒤를 이어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했다.

김유신은 마침내 신라 왕실과 인척관계가 되는 데에 성공했고, 이를 발판삼아 가야 출신이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몰락한 진지왕계 왕실의 김춘추의 정치적 영향력과 가야계 진골귀족의 김유신의 군사력이 결혼동맹을 통해 연결됐다고 평가된다.

이를 통해 김춘추와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신귀족 세력이 성립돼 구귀족 세력과 균형을 이루었다.

혼인은 당시 사회에서도 권력관계를 맺는 중요한 연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근친혼이 이루어졌던 시대라 할지라도, 남녀간의 만남에서 책임감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김춘추에게 문희가 정실부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첫 번째 부인의 사후라는 것은 이 사회가 일부일처(一夫一妻) 혼인 풍속을 행했다는 것이다.

만세의 기초가 되는 혼인은 인간의 본성을 상실하지 않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가정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이므로 수신제가(修身齊家)를 한 다음에 치국(治國)도 평천하(平天下)도 가능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