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독립운동가 문태수 의병장 선정
2월 독립운동가 문태수 의병장 선정
  • 신아일보
  • 승인 2008.02.13 18: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덕유산 일대서 맹활약 중 체포돼 옥중 자결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덕유산을 근거로 의병활동을 펼친 문태수·의병장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문태수 의병장은 경남 안의(安義) 출신으로 1905년 상경하여 면암 최익현(崔益鉉)을 예방, 격문을 내어 의병을 모집할 방책을 상의하고 호남지방으로 내려가서 지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했으며 무주(茂朱)에서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덕유산으로 가던 중 일본군 수명을 사살했다.
그 후 1906년 9월 중순경에 장수양악(長水陽岳)에서 박춘실(朴春實)을 만나 그를 선봉장으로 삼고 의병진을 합세해 전투를 전개하며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갔다. 9월 하순에 장수읍을 함락시키고 일본군과 오래 교전하며 적군 30여 명을 사살했으며, 이 접전에서 일본군의 무기 40여 정을 노획하고 적군을 추격해 무주 구천동에서 김성범(金誠範)을 중군장으로 삼았다.
1907년 1월에 무주 부남면 고창곡(高昌谷)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40여 명을 사살, 총기 50여 정을 노획한 뒤 덕유산 원통사(圓通寺)로 들어가 그 해 12월에 양주에서 각도의 의병진이 모일 때 호남군 100여 명을 이끌고 합세하고 호남창의대장에 추대되어 서울로의 진격작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이듬해 1908년에는 무주 덕유산을 근거지로 영남·호남 및 호서일대에서 많은 활약을 펼쳤다. 2월 28일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무주 주재소를 급습하여 적 5명을 사살하고 적군에게 체포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했다. 또한 4월에는 부하 150명을 통솔하고 장수읍(長水邑)을 공격하고 일본군 다수를 살상하였으며, 총기 등을 획득하고 주재소, 군아(郡衙) 등을 불 질렀다.
이어 1909년 1월에는 지례군(知禮郡) 소재 대덕산(大德山)에서 안의군 방면으로 의병진을 이동시키고, 4월 24일에는 4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용담군(龍潭郡) 이동면 장전리(長田里)를 공격했다. 그 해 5월 8일에는 남원군 문성(文城) 동북지역에서 100여 명의 부하들과 더불어 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10월에는 경부선 이원역(伊院驛)을 습격, 방화하고 일본군 3명을 포로로 붙잡고,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영동·옥천·청산·금산(錦山) 등에서 항일전을 벌여 적군을 다수 사살하고 총기를 노획했다. 또한 1909년 12월에도 무주를 중심으로 주변 제지방에서 격렬한 전투를 계속 전개했다.
이듬해인 1910년 대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위시하여 일본군을 도륙코자 계획을 세웠으나 적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여 각도, 각 항구 등에 헌병, 수비대, 기마병 등 만여 명을 배치하여 방어에 진력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덕유산으로 들어가 훗일을 계획하다가 1911년 8월 17일에 덕유산에서 일본군에 노출되어 포위·체포됐다.
체포된 후 시종 기개를 굽히지 않다가 1913년 2월 4일 옥중에서 자결하여 순국했다. 김삼태기자
stkim@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