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자명고를 없애버린다면 충실한 아내로 알고 맞아올 것이지만
만약 자명고를 없애버린다면 충실한 아내로 알고 맞아올 것이지만
  • 황미숙
  • 승인 2013.02.2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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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호동왕자(好童王子)의 아내, 낙랑공주(樂浪公主)
고구려가 나라를 세우고 안정되어가던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는 원비(元妃) 소생의 해우왕자(解憂王子)와 차비(次妃) 소생의 장자인 호동왕자(好童王子)가 있었다.

그러나 궁중에서 벌어지는 후계자의 갈등은 호동에게도 예외가 아닌 듯싶다.

원비 소생의 해우왕자는 아직 나이가 어릴 뿐 아니라 성격이 사납고 거칠었다.

그와 반대로 차비 호동은 용모가 수려하고 기상이 씩씩하고 마음이 착하므로 왕은 항상 호동을 사랑하고 그에게 기대를 걸어왔다.

원비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혹시나 자기 소생의 해우를 제쳐놓고 호동을 태자로 삼을까 불안스러웠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적마다 호동을 학대했다.

원비의 학대를 받으니 호동은 궁중에 있기를 싫어했고 항상 외지로 떠돌았다.

이때 고구려의 이웃나라 중에서 가장 방해가 된 것은 낙랑(樂浪)이었다.

낙랑은 한사군의 하나로서 고구려보다는 비록 국세가 약한 편이었으나 도저히 정벌할 수가 없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낙랑군이 다른 나라에게 정벌되지 않는 까닭은 적병이 국경에 쳐들어오기만 하면 스스로 울리는 북이 있어 이내 그 정보를 알게 되고 따라서 신속한 임전태세를 갖출 수 있는 때문이었다고 한다.

호동왕자와 낙랑태수 최리(崔理)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와의 비극은 그 ‘스스로 우는 북[自鳴鼓]’에 얽히어 벌어진 것이다.

대무신왕 15년 4월, 사방을 유랑하던 호동은 옥저(沃沮)땅에 이르러 마침 그 곳에 사냥을 나온 낙랑태수 최리를 만났다.

최리는 호동에게 고구려와 화친하는 뜻에서 후히 대접하고 싶으니 낙랑으로 가자고 권했다.

그러나 호동은 이 기회에 낙랑의 비밀무기인 자명고의 정체를 알아낸다면 자기 나라에 크게 이로울 것으로 여겨 최리를 따라 낙랑으로 갔다.

최리는 호동을 융숭히 대접하고는 마침내 자기 딸 낙랑공주와 혼인까지 시켰다.

낙랑공주와 혼인을 하고 나자 호동은 일단 혼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최리와 낙랑공주에게는 부왕의 허락 없이 혼인을 했으므로 먼저 돌아가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속셈은 자명고의 비밀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고구려로 돌아온 호동은 부왕에게 낙랑에는 자명고가 있다는 것과 그 자명고는 무고(武庫)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자 왕은 한 가지 계교를 말했다.

“네가 최리의 딸과 혼인을 했다니 최리의 딸은 비록 지난날엔 낙랑의 공주였지만 지금은 어엿한 고구려의 왕비이다.

마땅히 고구려를 위해서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니 네 아내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명고를 찢어버리도록 일러라.” 나라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왕으로선 당연한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호동에게는 괴로운 명령이었다.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자기만 기다리고 있는 공주에게 자명고를 없애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 죽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공주가 무슨 방법을 써서든지 자명고를 없애버린다면 그것은 낙랑으로서는 최고의 반역 행위이므로 아무리 공주라도 가혹한 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호동이 망설이고 있으려니까 호동을 미워해 온 원비는 그것을 미끼삼아 다시 왕에게 참소했다.

“호동이 아무래도 딴 뜻을 품은 모양이에요. 그러기에 자명고를 없애는데 주저하는 게 아니겠어요?” 이렇게 되자 호동은 낙랑공주에게 편지를 썼다.

<그대가 만약 자명고를 없애버린다면 충실한 아내로 알고 맞아올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남편과 남편의 나라에 대한 정성이 없는 것으로 알고 남이 되겠다.

호동의 편지를 받은 공주는 역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낙랑공주는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려서 비수를 품고 무고(武庫) 속에 숨어 들어가 마침내 자명고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 그 사연을 비밀히 고구려에 있는 호동에게 전했다.

자명고가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대무신왕은 곧 군사를 일으켜 낙랑을 습격했다.

고구려군이 거침없이 낙랑 땅에 쳐들어 갈 때까지 낙랑에서는 자명고가 찢어진 것을 모르고 있었다.

고구려 군사가 성(城)밑에 이르게 된 후에야 알게 되었으며, 사전에 방비를 못하게 된 것이 공주(公主)의 소행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공주를 죽이고 항복한다.

이상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이때 낙랑이 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그보다 5년 후에 멸망했다고 한다.

남녀간의 사랑을 조국에 대한 배신이라는 비극으로 기록한 김부식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연애사의 아름다움을 전하고자 했던 것인가, 아니면 남녀유별(男女有別)을 위한 것인가? 철저한 유교정신을 요구했던 사회가 아닌 고려사회에서의 혼인은 조선시대와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호동과 낙랑의 혼사가 집안간의 정식 혼인절차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야합이라는 점에서 그것도 정치적 의도로 맺어진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비극을 경계하려는 것은 아니었나 싶다.

이와 같이 수단으로 맺어지는 혼인의 결말은 지금이나 수세기 전이나 같은 모양새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