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 황미숙
  • 승인 2013.02.1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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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고려말 학자, 길재(吉再)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는 길재의 싯구를 지금도 여전히 읊조릴 수 있다는게 신기하다.

그의 지조가 빛나는 것이라며 설명해 주시던 국어선생님은 희미하게 기억되는데 학창시절 외우던 시들은 잊혀지지 않는다.

금오산(金烏山)을 바라보며 낙동강 굽이도는 언덕의 길재 묘소 멀지 않은 곳에 1768년 영조 때 선비들이 그의 ‘백세청풍(百世淸風)’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지주중류(砥柱中流)’라는 넉자의 큰 글자를 새겼다.

이것은 지주산(砥柱山)이 황하(黃河)의 급류 가운데에 있다는 것으로, 사람됨이 굳세고 강하여 위태로운 국면을 지탱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렇듯 삼군(三軍)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어도 필부(匹夫)의 뜻은 빼앗을 수는 없다는 말은 아마도 길재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길재(吉再, 1353~1419)의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자는 재부(再父)이고 호는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아버지 원진(元進) 벼슬이 보성대판(寶城大判)이 되었을 때, 공의 어머니 김씨(金氏)가 따라가면서 박봉으로 생활이 어려우므로 길재를 외가에 맡겨 두고 갔다.

나이가 여덟 살이었는데, 어머니를 사모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울부짖으며 남계(南溪)에 놀면서 석별가(石鱉歌)를 지었다.

“자라야 자라야 너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느냐. 나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도다.

내가 너를 삶아 먹을 줄 알건만, 어머니 잃은 것이 나와 같으므로 너를 놓아준다”하고 물에다 던져주고 울부짖으니,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감동하여 울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 정경세 (鄭經世, 1563~1633)의 시문집인 《우복집(愚伏集》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절개를 칭송 하고 있다.

공이 급제한 것은 1386년(우왕 12년)이고, 주서가 된 것은 1389년(창왕 원년)인데, 이해 겨울에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니 그 이듬해 경오년에 공이 어머니가 늙은 것을 이유로 하여 사직하고 돌아갔다.

그러면 효온의 뜻은 공이 신조(辛朝)를 섬기다가 공양왕 섬기는 것을 부끄럽다는 이유로 물러갔음을 말한 것이다.

대개 우왕이 신돈의 소생임을 세상 사람들이 많이 의심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고려에 대하여 몰래 국운을 옮긴 역적인데, 공이 이에 신하로 섬기는 것을 달게 여기고 도리어 왕씨가 반정(反正)하는 초에 그만 물러가서 신씨(辛氏)를 위하여 한평생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면 그 진퇴가 어찌 근거 없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이제 공을 논평하는 자가 우왕과 창왕의 일은 한 구석에 제쳐 놓고, 다만 공이 고려조의 근신(近臣)으로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벼슬을 버리고 가서 종신토록 나오지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두 성의 임금을 섬기지 않은 것이 분명하게 된 것이니, 어찌 광명하고 정대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반드시 포은을 끌어들여 한 임금을 섬겼느니 두 임금을 섬겼느니 하여 우열을 따지니, 효온은 여기에서 포은을 비방할 뿐 아니라 이에 야은도 비방하는 것이다.

야은은 벼슬이 낮으니, 나라가 망한다고 같이 망할 의리가 없으므로 기미를 보아 물러갔고, 포은은 대신이라 한 몸에 국가의 중책을 맡은 까닭에 위기에 이르러 목숨을 바치고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 것이니 두 사람의 일이 다 중도(中道)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분의 처신에서 쉽고 어려운 것을 말한다면 어느 것이 쉽고 어느 것이 어려운가는 참으로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국조보감》에서 남효온은 “명은 기러기 털보다 가볍고, 의는 산보다 무거우니(命輕鴻毛義重山)/공과 달가(達可, 정몽주의 字)가 이 이치를 알리라(公與達可知此理)/ 달가는 몸소 두 성(姓) 임금을 섬겼으니(達可身經二姓王)/ 좋은 재목에 한 치가 썩었고 거울 가운데 티가 있다(杞梓寸朽鑑中疵)/ 공의 몸 맡긴 곳은 한 임금뿐이니(公身所委惟一君)/ 진실로 알고 독특히 행함은 비할 이가 없도다(眞知獨行難與比).” 정몽주가 신씨(辛氏)와 왕씨(王氏) 두 성(姓)의 임금을 섬겼다며, 야은 길재와 포은 정몽주가 의리에 비하면 목숨이 가볍다는 이치를 알았다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명리를 위해 손바닥 뒤집듯이 철새처럼 따라 다니고, 말 바꾸기를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쉽게 여기며 당시에는 앞장서서 내세우던 구호를 젊은 날의 객기쯤으로 치부하는 그들에게 야은은 무어라 할는지 모를 일이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으며, 김숙자(金叔滋)를 비롯하여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등이 학맥을 이었다.

서리보다 차고 물보다 맑게 살다간 그의 절개가 찬바람 부는 지금 더욱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