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마땅히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
너는 마땅히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
  • 황미숙
  • 승인 2013.02.04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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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고려의 명장, 무민(武愍) 최영(崔瑩)
최영(崔瑩, 1316~1388)은 본관은 동주(東州, 철원)이며,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우왕 14년 3월 명나라가 쌍성총관부 관하지역을 영유하기 위해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고려에 통고해 왔다.

이에 최영은 요동정벌을 결심하고 팔도도통사가 돼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는 한편,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로 해금 군사 3만 8800여명으로 요동을 정벌하게 했으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달래어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위화도에 출전했던 이성계가 회군한다는 급보를 받은 우왕은 평양에 있었다.

최영과 같이 개경으로 돌아와 대책을 의논하던 중 위화도로 출정했던 북벌군이 개성 밖에 도착해 포진한 다음 ‘북벌 주동자 최영을 없애지 아니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외쳤다.

이성계가 난입해 최영은 화원에서 우왕과 같이 잡혔다.

이성계는 지장사에서 회군 장병들의 회의를 열어 최영을 위시한 송광미, 인원실, 정계회 등을 각지로 유배시키고 우왕은 강화로 추방한 다음 9세가 된 창(昌)을 왕으로 옹립했다.

그리해 용맹하며 청렴했던 최영은 이성계에게 잡혀 고봉현(高峯縣:지금의 高陽)으로 귀양 갔고, 다시 합포(合浦:지금의 馬山)·충주로 옮겼다가 공료죄(攻遼罪:요동을 정벌한 죄)로 개성으로 압송돼 순군옥(巡軍獄)에 갇힌 뒤 그해 12월에 참수됐다.

이 소식을 들은 개성 사람들은 저자의 문을 닫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최영을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최영의 묘는 풀이 돋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1976년부터 풀이 돋아, 현재는 무성하다고 한다.

무속에서 ‘최영장군’은 수명장수, 안과태평을 기원하는 신으로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가장 많이 모셔지는 신령 가운데 하나이다.

신촌에서 서강대학교 방향의 마포구 대흥동 416번지 일대의 고개를 불당재라 했다.

그 명칭 유래는 고개 근처에 최영장군의 신상(神像)을 모신 불당이 있었기 때문이며, 근처 마을이름 역시 불당재라 했다.

불당이라 불리어지는 당우(堂宇)에는 고려 말의 명장 최영장군의 신상을 모시고 특히 이 지역에 자주 발생했던 화재와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300여 년 전 이 일대 동막하리(東幕下里)에 자주 화재가 발생했는데, 지나가던 어느 도인이 개성 덕물산의 최영장군 제단을 이전해 오면 화재가 나지 않을 것이라 해 당우를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고 한다.

불당 옆에 신목(神木)으로 상나무가 있었다.

불당 안에는 최영장군 부부를 주신으로 모셨으며, 명덕당(明德堂)이라는 신당 안에 공민왕을 비롯해 신격(神格)이 밝혀지지 않은 무속신을 봉안했다.

그러나 1988년 1월 1일 불이 나서 당우가 불타버렸으며, 지금은 제사도 지내지 않고 당 터와 나무 몇 그루가 남아 있을 뿐이다.

순암 안정복은 《순암집》 〈고려사를 읽고 느낌이 있어〉에서 다음과 같이 최영장군을 이야기하고 있다.

“명나라 황제 위력을 물리칠 자 누구던가/요동 정벌 나서다니 닭이 삵쾡이 잡으려는 격/최공이야 어쨌거나 진실로 충신이었지/피맺힌 일편단심 죽어 변치 않았다네” 또한 〈동사문답(東史問答)〉중에는 “최철성(崔鐵城, 최영)은 연만하고 노련한 장수로서 본래 지계(智計)가 많았는데, 요동(遼東)을 범한 한 가지 일은 어찌 그리도 헤아리지 못했던가요. 그의 뜻은 비록 우리 태조에게 허물을 돌리기 위해 한 것이라 하겠으나 나라를 비운 채 군사를 동원해 그저 남에게 주고도 스스로 패하지 않을 자 어디 있겠습니까? 이때는 공양왕의 세상과 다릅니다.

최영은 지위가 상상(上相)에 놓이고 몸소 대군(大軍)을 장악했으니 무슨 일인들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마는 하필 이런 졸렬한 꾀를 냈을까요? 이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라며 그가 요동정벌에 무모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나서고도 싸워보지도 않고 불가론을 내세우며 돌아선 자와 영토를 되찾으려는 자 중에서 누가 어떠한가를 논평하기에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지금에서 새삼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겐가. ‘요동 땅’ 아직도 서슬 퍼렇게 바라보고 있을 고구려인의 기상은 언제쯤이나 다시 펼치겠는가. 한반도 반쪽에 갇혀진 포부는 섬나라도 아닌데 잠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