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눈”(雪)
[독자칼럼]“눈”(雪)
  • 신아일보
  • 승인 2008.01.1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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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충 부산지방국토관리청장
"눈덮힌 겨울山野, 그 순백의 대지는 보는 이들의 숨을 멎게 하고, 세상 시름을 잊게 하고, 모든 걸 용서하게 만든다. 누구나 눈에 대한 추억 한 두개쯤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기 마련이다."

실상 그 사연들이야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일수도, 추위와 공포에 떨었던 아찔한 순간일 수도 있겠지만 기억속에는 흐뭇하고 아름다운 편린만 남게되는 법이고, 가끔씩 이런 필름들을 되돌려 보노라면 팍팍한 일상 속에서도 잠시나마 위안을 느끼게 된다.
내게는 86년 스페인 유학시절 여름방학에 알프스를 여행하면서 잠시 들렀던 작은 도시, 다보스의 설산풍광이 아직도 선명하고 그 곳 울창한 침엽수림 아래 호숫가에 누워 멀리 설산을 바라보며 한나절을 여유롭게 즐겼던 시간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때로는 영화속의 설경도 실제와 다름없는 감동을 선사하기도 한다.
‘닥터 지바고’에서 시베리아열차가 레일도 보이지 않는 눈밭을 가르며 내달리는 장면도 인상적이고, 일본영화 ‘철도원’이 영상으로 담아낸 북해도의 설원과 그 속을 외롭게 달리는 빨간색 전동차가 빚어내는 절묘한 콘트라스트는 가히 압권이라 할 만 하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눈의 실체는 조금 더 복잡하다. 겨울들어 첫눈이 내리면 꼭 젊은 연인들이 아니더라도 너나없이 설레임에 들뜨게 되고 아무런 약속 없이도 마냥 눈을 맞으며 걷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가로등 불빛을 적시며 내리는 소담스런 눈송이를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하지만 이런 낭만적인 밤이 지나고 아침을 맞으면 결코 녹녹하지 않은 상황이 눈앞에 펼쳐진다.
채 치우지 못한 눈은 가로변에 거무튀튀하게 쌓여 질척거리고, 밤사이 얼어붙은 눈이 빙판으로 변해 출근길이 아수라장이 되곤 한다.
폭설이라도 내리면 곳곳의 도로가 끊겨 산간마을이 고립되고 눈사태로 고귀한 인명이 희생되는가 하면 비닐하우스가 통째로 내려앉아 농민에게 깊은 시름을 안겨주기도 한다.
겨울을 겨울답게 해주는 눈은 이처럼 야누스적인 속성을 갖는다. 눈이 결코 반갑지만은 않은 사람들이라면 어떤 이들이 있을까?
우선 기상청 사람들이 떠오른다. 지난주만 하더라도 하필 대입 논술시험이 있는 날에 예상보다 많은 폭설이 내려 수험생들이 큰 곤욕을 치르는 일이 벌어졌다.
기상예보가 빗나가는 바람에 혼란이 가중되었다고 비난이 쏟아졌지만, 기상청인들 어디 그러고 싶어 그랬겠는가? 인간의 통제영역 밖에 있는 변화무쌍한 날씨를 상대해야하는 그들의 고뇌가 안쓰럽다.
한겨울 내내 도로현장에서 제설작업에 임하는 사람들도 빼놓을 수 없다.
눈이 내려 교통이 두절되거나 어려워지면 국민들이 당장 일상생활에 불편을 겪고 산업 활동이 영향을 받게되기 때문이다.
겨울철 제설책임은 건설교통부와 각 지자체가 나누어 맡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국토의 신경망이라 할 국도가 원활하게 소통될 수 있도록 최일선에서 눈과 씨름하는 이들이 있으니, 곧 전국의 18개 ‘국도유지건설사무소’의 역군들이다.
때때로 불가 항력적인 폭설이 내리면야 어쩔 도리가 없지만, 국민들이 어지간한 눈이 내려도 큰 불편 없이 도로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밤낮없이 현장에서 땀흘리고 있는 이들의 묵묵한 수고가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이들과 함께 도로현장을 지키고 있음에 무한한 보람과 긍지를 느낀다.
최근 이라크의 바그다드에도 100년만에 눈이 내렸다는 소식이다.
부디 테러와 전쟁으로 갈기갈기 찢긴 이라크인들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고, 나아가 중동에 평화를 안겨주는 瑞雪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