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압아(古押衙) 같은 의사가 지금은 없구나
고압아(古押衙) 같은 의사가 지금은 없구나
  • 황미숙
  • 승인 2013.01.21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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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고려 삼별초의 장군, 김통정(金通精)
김통정 장군 어머니는 과부로서 개성(開城) 교외에 홀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밤에 잠자리에 들어 꿈을 꾸면 ‘지렁이’가 자꾸 와서 김통정의 어머니를 희롱하다 간다.

보기 싫은 지렁이가 나타나는 것이 싫었고 꿈도 이상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배가 나날이 불러갔다.

과부가 웬 남자와 놀아났다는 소문은 온 동네에 퍼졌다.

배는 자꾸 불러가고 동네 사람들은 과부가 아기를 배었다고 웃고 도저히 이 동네에서 살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동네 촌장에 찾아갔다.

촌장 역시 그렇게 착한 부인이 외간 남자를 불러들일 리는 없다고 의아하게 생각하던 차였던 것이다.

김통정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촌장은 “오늘 저녁에는 그놈의 지렁이가 오거든 실을 준비하였다가 몸에 묶어 두게. 그리고 나서 다음날 실을 흘린 곳을 찾으면 그놈을 찾아봅시다.

” 그날 저녁 김통정의 어머니는 촌장 말씀대로 하였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일찍 실을 따라 가봤는데 실이 어느 집 울타리 밑으로 들어가 있어 그곳을 파보니 큰 지렁이가 몸에 실을 묶은 채 있었다.

바로 ‘이 지렁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 자리에서 그냥 죽여 버리려고 하였으나 한편 생각하니 죽일 수도 없었다.

나의 배속에 있는 아이는 바로 이 지렁이의 자식이라 생각하니 행동은 괘씸하지만 죽일 수만은 없어 그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가 바로 김통정(?∼1273(원종14))인 것이다.

항파두리성은 제주도 말로 ‘철옹성’이라는 뜻이다.

삼별초와 제주도 사람들이 함께 쌓은 흙성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현재 북제주군 애월읍 고성리에 그 일부가 복원되어 남아있다.

고려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은 몽골에 대항하여 강화도에서 진도를 거치고 탐라(제주)에 들어와 백성들을 동원하여 성을 쌓기 시작했다.

먼저 내성을 쌓고 그 주위를 빙 둘러 외성을 십리나 쌓았다.

당시에 여‧몽연합군이 항파두성 외성은 넘어 왔으나 김통정 장군이 내성의 쇠문을 안으로 굳게 잠그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내성 안으로 침입할 수가 없었다.

어찌나 성문이 단단한지 그들이 가지고 온 온갖 신식무기를 총동원하여도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김방경 장군은 문을 부술 방안을 구하였다.

“이 문을 부술 장병들을 여기로 집합시켜라. 이 문을 부수는 장병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다.

” 이렇게 하여 여‧몽연합군의 장군 및 병사들이 성문 앞에 모여 들었으나 성문은 여전히 그대로 잠겨 있는 것이다.

연합군이 순식간에 외성까지는 점령하였으나 문 하나 때문에 내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이 모습을 지켜보는 김통정 장군의 아기업게가 있었다.

이 아기업게는 김통정 장군과 같이 성문 안으로 미처 들어가지 못한 낙오자였다.

이 아기업게가, “이 문을 못 열어 이렇게 여러 장수들이 쩔쩔 맵니까?” “귀신도 잡는다는 김방경 장군이 머리가 돌지 않는 돌대가리라니……” “그래, 어찌하면 이 문을 열수 있겠느냐?” “쇠문 밑에 두 이레 동안 불을 때면 이 문은 자연이 녹아떨어집니다.

” 김방경 장군은 즉석에서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하여 14일 동안 이 쇠문 밑에 불을 피우니 문이 녹아내려 앉아 연합군은 내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연합군이 내성 안으로 침입하자, 김통정 장군은 할 수 없이 한라산 쪽으로 후퇴하면서 이 생각을 제공한 아기업게를 연합군으로부터 다시 뺏어내어 안오름에 끌고 가서 죽이니, 흙이 피로 물들어 지금도 안오름의 흙이 붉은 것이라고 일설에 전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제주도에서는 “아기업게 말도 귀담아 들으라”는 속담이 전해졌다.

이곡(李穀)은 《가정집(稼亭集)》에서 “성원이 통일한 뒤로 지금 고압아가 없어서(聖元混一今無古), 당시에 할거한 인사들을 우습게 본다네요(笑殺當時割據人)”라며 과거 몽골[蒙古]에 대한 처절한 항전의 역사를 이곡의 시대에 와서는 사람들이 모두 망각하고서 한낱 웃음거리로 치부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고압아는 당나라 설조(薛調)가 지은 《무쌍전(無雙傳)》에 나오는 인물 이름인데, 고압아가 몽골 군대에 대항하여 분투했던 것을 은연중에 비유하고 있다.

30년에 걸친 고려 삼별초(三別抄)의 피어린 대몽 항쟁의 역사가 이곡(李穀)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책을 엮는 중에 ‘삼별초(三別抄)는 해적고(海賊考)에 넣어야 하고, 이시애(李施愛)와 이괄(李适) 등은 토적고(土賊考)에 넣어야 한다’고 했다.

뜻을 세우고 그 뜻에 따라 온몸으로 부딪쳐가며 끝까지 굽히지 않는 정신으로 당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자들이 몇 줄의 글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적당히 뒷줄에 서서 제 실속이나 구하는 자들의 눈에는 삼별초의 항쟁은 무모함 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큰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라면 작은 것에 매달려 큰 것을 잃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그러나 뜻을 세울 줄도 모르고 더욱 실천할 줄도 모르며, 자신의 이로움만을 찾는 자들에게는 이도저도 상관할 바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