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이화령’
백두대간‘이화령’
  • 박 태 건 국장
  • 승인 2013.01.17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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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이화령(梨花嶺)은 경북 문경읍과 충북 괴산 연풍면 사이 추풍령과 죽령 사이의 큰 고개로 본래 이유릿재였다.

이유릿재의 정확한 유래는 알길 없으나, 다만 조선시대부터 문경지방에는 “새재로 갈까, 이유리로 갈까”하는 노랫말로 추론하여 보면 길이 험하고 산짐승의 피해가 두려워 여럿이 함께‘어울려 넘는 고개’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정도이다.

1925년 일제시대에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이화령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현재는 3번 국도가 지나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화령이 이화현(梨花峴)으로 나오며, 다른 조선시대 고지도 같은 문헌에는 모두 이화현으로 기록되다가 일제시대 신작로를 닦은 뒤에 일본식 지명으로 이화령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인근 조령천과 연풍천이라는 계곡에 봄이되면 배꽃이 많이 피고 하얀 색으로 온 산이 눈이 온듯 하였다고 해서 배 리(梨)에 꽃 화(花)를 써서 이화령이라 했다고 한다.

이화령의 높이는 548m이고, 소백산맥의 조령산(1,017m)과 갈미봉(783m)과의 안부(鞍部)에 위치해 있다.

연풍에서 하곡을 따라 올라가 원풍리를 거쳐 분수령에 이르면 동쪽은 새재마루의 조령 제3관문이고, 서쪽은 소조령(小鳥嶺)이다.

소조령을 넘으면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水安堡)에 이른다.

지난해 11월 일제 강점기 시절, 도로 개설로 끊겼던 백두대간 이화령 구간에 터널를 만들어 생태통로를 복원했다.

87년만에 제 모습을 찾은 이곳에 최근 야생동물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설치된 CCTV에 포착됐다.

그동안 단절돼 한반도의 생태축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백두대간 이화령 구간이 제모습을 찾았다는 것은 민족의 얼을 되찾는 상징적 의미와 함께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