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이 중국을 감동시킨다는 말은 임자를 두고 하는 말이오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킨다는 말은 임자를 두고 하는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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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1.1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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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고려의 문신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李承休)
이승휴(李承休, 1224(고종 11)∼1300년(충렬왕 26))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휴휴(休休), 자호(自號)는 동안거사(動安居士)이다.

경산부 가리현(京山府加利縣) 사람으로 가리 이씨(加利 李氏)의 시조이다.

29세에 과거 시험에 급제했다.

과거 급제 후 홀어머니가 있는 삼척으로 금의환향했으나, 몽골의 침입으로 환도하지 못하고 두타산 구동(龜洞)에서 농사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원나라에서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한 사실을 알려오자 원나라에 가서 책봉을 하례했다.

원나라에서 올린 그의 표문(表文)은 원 세조(世祖)와 낭리(郎吏)들의 탄복을 받았다.

동행했던 송송례도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킨다는 말은 임자를 두고 하는 말이오”라고 탄복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귀국 후 벼슬이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전중어사(殿中御史)가 되었으나 한동안 벼슬을 떠나 용안당(容安堂)에서 《제왕운기》, 《내전록》을 저술했다.

용안당은 오늘날의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두타산 아래의 천은사(天恩寺)에 있다.

충렬왕 6년에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 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했다가 파직된 후 국사와 세론에 일절 함구하고자 했다.

77세를 일기로 고단한 생을 마쳤다 《제왕운기》 는 2권(상·하) 2책의 목판본으로 이승휴가 1280년(충렬왕 6) 권문(權門)과 부원세력을 비판했다가 정계에서 쫓겨나 은둔하던 중 저술하여, 1287년에 왕에게 올린 책이다.

상권은 반고(盤古)로부터 금(金)나라까지 중국의 역사를 7‧5언시로 읊었으며, 하권은 1·2부로 나누어 단군부터 충렬왕까지의 역사를 서술했다.

이승휴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고려의 현실에 있다고 했다.

당시 고려사회는 무인정권·몽골과의 전쟁을 거쳐 원(元)에 복속한 시점으로 사회적·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지방의 한미한 가문 출신의 문신이던 이승휴는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왕의 선정이 절대적이라고 보았고, 이를 위하여 역대사의 교훈을 시로 기록한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원의 비호를 고려왕실의 영광으로 칭송하고, 충렬왕의 치세를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현재의 실정에서 왕권을 통한 정치와 통치력의 회복을 바라는 이승휴의 심정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원래 부여·고구려·신라 등은 각각 자신의 시조설화를 갖고 있었지만, 그는 시례(尸禮)·고례(古禮)·남북옥저·동부여·예맥부터 삼한·신라까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했다.

이것은 사학사(史學史)상 매우 중요한 인식의 전환으로 발해도 단군의 후손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승휴는 〈동국군왕개국연대〉에 발해를 수록했는데, 이는 이 시기의 사서가 발해에 대해 소홀했던 것에 비하면 대단히 획기적인 일이다.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 권4에 수록되어 있는 《빈왕록》은 이승휴가 서장관에 임명되어 1273년 원나라 수도 대도(북경)를 다녀온 후 1290년 10월에 편집해 남긴 기록이다.

1273년 원나라 황제가 황후와 황태자의 책봉을 천하에 반포하자, 고려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사절단을 파견하게 된다.

이승휴는 사절단의 서장관이라는 직책으로 임명되고, 사행 길에 겪은 일과 황제를 만나 예를 표하는 예식까지 장장 112일에 이르는 이야기이다.

《빈왕록》은 서문에서 ‘어느 날 상자를 뒤지다가 지난날의 삶의 부침(浮沈)이 새로워 사행 기록을 한 부 엮어서 《빈왕록》을 냈다’라는 말과 함께 책 전체를 간단히 요약, 정리하고 있다.

특히 이승휴가 대도에 도착해서 8월 24일에 황제인 세조(世祖) 쿠빌라이를 만나 표문을 올리고, 그 후 황후, 황태자, 중서성 단사관 등을 만나 사절로서 예수(禮數)를 행하는 등의 절차를 정리했다.

이때 원 황제에게 올린 표문(表文)이 격식에 맞는 문장이라 하여 칭송이 자자했다.

이 표문 때문에 이승휴는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킨 사람이라고 지칭되었다.

그러나 《동안거사집》에서 보여준 웅혼은 사라지고, 《빈왕록》 속의 이승휴는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었다.

려강(濾江)의 석교가 비록 전쟁의 시발점이 된 ‘노구교 사건’으로 기억된다고 하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마르코 폴로의 다리’, 노구교(蘆溝橋)에 대해 이승휴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울분을 감춘 그의 시에서 노구교를 극찬 한다.

“여강의 석교는 천하에 널리 알려졌지…아름답고 장엄한 규모 사람의 솜씨는 아니지, 진정 천안으로 교묘히 분별하여, 몰래 와서 설치한 것이겠지, 그것이 아니라면 중추의 밝은 달이, 청광 수채가 창공을 새롭게 수놓은 것을, 미련한 이가 그만 쏘아 떨어뜨린 것을, 주워 모아 강물 위에 빗겨 던졌는가?…꼬불꼬불 휘어진 난간이 서로 받쳐주고, 쭈그리고 걸터앉은 원숭이와 호랑이에 서린 교룡, 어린이 업고 공중에서 춤을 추는 듯, 구경꾼들 헤아리기 어렵네…”라고 하였다.

함박눈 속을 2시간씩 걸어서 집에 돌아오면서도 사고 없는 하루라며 감사해 한다.

두 번씩이나 눈길에 넘어져 여기 저기 멍이 들어서도, 오히려 다행이라고 어루만진다.

한해가 가고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세상은 제 갈 길로 가고 있다.

그리고 말없이 역사의 현장들은 그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초라한 서장관의 관람에서, 난데없는 이방인의 눈길에서, 전쟁의 총성에서 조차 말없이 서있던 노구교가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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