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대통령의 딸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 문경림.이은지기자
  • 승인 2012.12.2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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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난관 딛고 ‘헌정 사상 첫 여성 대통령’역사 써내
대한민국 사상 첫 여성 대통령, 박근혜 당선인은 34년 만에 청와대에 다시 입성하게 됐다.

박근혜 대통령당선인은 부모를 모두 흉탄에 잃고 정치계에 입문하기까지 18여년 동안 은둔에 가까운 삶을 살아온 ‘비운의 여성’ 이미지가 강하다.

정치적으로는 한나라당을 위기에서 두 번이나 구해낸 구원투수로 ‘위기에 강한’ 이미지를 다져왔다.

퍼스트레이디 직무대행 그리고 은둔 박근혜 당선인은 1952년 대구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9살 되던 해 선친인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이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서울의 외가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성심여중에 입학하면서 뒤늦게 청와대 생활을 시작했다.

아버지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박 당선자의 인생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12살 때부터 대통령의 딸로 청와대 생활을 시작한 박 당선자. 항상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가르치며 검소한 생활을 보였던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통학하는 등 특권층과 거리가 먼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1974년 서강대학교(전자공학 전공)를 졸업한 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지만 6개월 만에 육영수 여사의 갑작스런 서거로 귀국, 1974년부터 퍼스트레이디 직무대행을 했다.

어머니의 죽음은 평범한 삶을 원했던 박 당선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는 이 당시를 “비록 제 꿈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때부터 저는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게 됐다”고 회고한다.

22살에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가 된 박근혜 당선자는 슬픔을 추스를 여유도 없이 각종 대외적인 자리에 안주인 역할을 하며 아버지 옆에서 자연스럽게 국정운영 수업을 받게 된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1979년 10월 26일 또 한번의 총성이 그녀의 운명속으로 날아들었다.

청와대 생활 15년 만에 부모님 두분을 모두 떠나보냈다.

박 당선인은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청와대 생활을 접고 동생들과 함께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박 당선인은 당시 전두환 합수부장으로부터 9억원(후에 3억원은 돌려줌)을, 1982년에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으로부터 300평 규모의 성북동 자택을 받았다.

이후 사실상 ‘은둔’ 생활을 시작한 박 당선인은 육영재단과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 1994년 인수한 정수장학회 운영에 몰두했다.

그러나 육영재단 운영권을 둘러싸고 동생들과 치열한 다툼이 시작되면서 폭력사태와 5촌 조카 살인사건 등이 발생하는 등 잡음이 일어나기도 했다.

부모님의 빈 자리를 대신해 한 집안의 가장이 된 그는 격변하는 한국 정치사 속에서 조금씩 잊혀져갔다.

1998년 정계입문, 구원투수 등판 오랜 침묵의 세월을 깨고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게 된 건 1998년 대구 재보궐 선거. IMF로 파탄난 대한민국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역전드라마를 만들어내며 ‘정치인 박근혜’로 각인된다.

박근혜 당선인은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나라당에 입당해 이회창 후보 대선캠프 고문을 맡으며 정치계에 입문, 이듬해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대구 달서구에 출마했고, ‘정치인 박근혜’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1년 이회창 총재가 당 개혁안을 거부하자 이에 반발해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지만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나라당과 합당했다.

미래연합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이던 2002년 5월12일 북한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1시간 동안 단독회담을 했다.

새누리당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난 정치인은 박 당선인이 유일하다.

박 당선인은 2004년 3월 한나라당이 불법 대선자금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위기에 처하자 당 대표를 맡아 당 쇄신작업을 진행, 이른바 ‘천막당사’ 시대를 열었다.

한나라당은 이에 힘입어 4·15 (17대) 총선에서 121석을 확보했고 박 당선인은 잠재적인 차기 대권주자로 발돋움했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 2005년 12월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사학법을 직권상정해 처리하자 곧바로 장외투쟁을 선언, 3개월 만에 사학법 재개정 논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친이-친박 갈등 딛고 구원투수로 박근혜 당선인은 2006년 5월20일 지방선거 유세 도중 피습을 당하면서 정치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를 겪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당시 열세였던 선거 분위기가 우호적으로 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스스로 이 이후를 “덤으로 얻은 제2의 인생”이라고 말했다.

박 당선인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 출마,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석패하자 전문가들로부터 개인수업을 받으며 정책을 가다듬고 현장을 다니면서 절치부심했다.

그는 경선방식 등 논란에도 불구하고 깨끗이 승복함으로써 차기 대권주자로서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친이(친이명박)계와 친박(친박근혜)계 간 갈등이 본격화된 시점이기도 했다.


친이-친박 갈등은 18대 총선 공천에서 대거 탈락한 친박계가 대거 탈당해 ‘친박연대’를 창당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박 당선인은 한나라당에 남았지만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며 친이계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후 친박계 정치인들의 한나라당 복당을 꾸준히 요구, 친박계 60여명의 복당을 관철시켰다.

박 당선인은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선 패배로 당이 어려움이 처하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다시 구원투수로 나섰다.

그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당 체질개선에 나섰고 4·11 총선에서 과반 152석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가 일명 ‘선거의 여왕’임을 다시한번 입증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7월 대선 경선에 재도전해 12월19일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근혜 당선인은 “제 삶이 개인의 삶 대신, 국민과 함께 가는 공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저에게 국민은 늘 가족이었다”며 “국민들의 삶과 애환을 듣고,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제 인생의 가장 큰 가치였다”고 자신의 인생을 회고했다.

2007년 대선 경선 패배로 정치 일선에서 잠시 물러났지만, 지난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다시 나서 4.11총선까지 예상 밖 승리로 이끌었다.

박근혜 당선인은 직선제 이후 처음 과반 득표를 하면서 최초로 아버지에 이어 대통령에 선출된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으로 우뚝 서게 됐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프로필
▲1952년 2월2일(양력) 대구 ▲1970년 성심여자고등학교 졸업 ▲1974년 서강대학교 이학사(전자공학 전공) ▲1987년 자유중국 문화대학 명예문학박사 학위 ▲2008년 카이스트 명예이학박사 학위 ▲2008년 부경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학위 ▲2010년 서강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학위▲1974~1979년 퍼스트 레이디 대리 ▲1974년~현재 재단법인 육영수여사 기념사업회 이사장 ▲1994년~현재 한국문인협회 회원 ▲1998~2000년 15대 국회의원(국회 산업자원위원회·여성특별위원회) ▲1998~2002년 한나라당 부총재 ▲2000~2004년 16대 국회의원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국회 여성위원회 위원/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위원) ▲2002년5월~2002년11월 한국미래연합 대표최고위원 ▲2003년 한나라당 대선 선대위 의장, 한나라당 상임 운영위원 ▲2004~2008년 17대 국회의원 (국회 국방위원회·행정자치위원회·환경노동위원회 위원) ▲2004~2006년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 ▲2007년 한나라당 17대 대통령 경선후보 ▲2008~2012년 18대 국회의원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기획재정위원회 위원) ▲2011년12월~2012년5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2012년5월30일~12월10일 19대 국회의원 ▲2012~2012년12월19일 새누리당 18대 대통령 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