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순국 80주기를 맞아...
윤봉길 의사 순국 80주기를 맞아...
  • 신 상 구
  • 승인 2012.12.18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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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9일은 제18대 대통령 선거일인 동시에 매헌(梅軒)윤봉길(1908-1932)의사 순국 80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50분경 일제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일왕 히로히토 생일)과 상해 점령 전승기념 축하행사에서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투척하여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이날 총사령관인 시라카 요시노리와 상해 일본거류민단장인 가와바타 사다쓰구가 사망하고, 여러 명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러자 중국 국민당 장개석 총통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극찬했고, 이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는 거사 직후 체포 연행되어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32년 12월 19일 금택형무소 교외 삼소우 공병작업장에서 강제로 무릎이 꿇려진 채 잔혹하게 총살되어 25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10세 되던 해인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충격을 받아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다.

그 후 윤봉길 의사는 동생인 윤성의와 함께 한학을 공부했고, 14세 때인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烏峙書塾)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 선생 문하로 들어가 사서삼경을 배웠다.

문장력이 뛰어나 1923년 오치서숙의 시 대회에서 장원을 했고, 1928년에는 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1926년에 오치서숙을 졸업하고,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농민 운동에 관심을 갖고, 오치서숙 동창들과 뜻을 모아 야학을 개설했다.

그는 가난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청소년들에게 한글, 역사, 수학, 과학, 농업 등을 가르치면서 수업의 교재로『농민독본』을 저술했다.

한편 1929년에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고 인기리에 '토끼와 여우’를 공연했다.

그러자 윤봉길 의사는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는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농촌자활운동을 펴나갔다.

그리고 농민들의 건강 증진을 위해 수암체육회를 조직했다.

일제의 감시가 점점 더 심해져 활동이 어렵게 되자 윤봉길 의사는 23세 때인 1930년 3월 6일 충의대교를 건너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김구 선생의 지도하에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조국 광복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가 상하이 홍구공원 의거 80주년을 맞이 하여 발간한『매헌 윤봉길 전집』에 게재된 『농민독본』, 한시(漢詩), 편지, 일기 등을 보면 윤봉길 의사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애국지사임을 알 수 있다.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에서는 1965년부터 기념관 건립, 평전과 전집 발간, 동상과 숭모비 건립 등 다양한 선양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 국사교과서를 보면 윤봉길 의사가 상해로 망명하기 전에 향리에서 농촌 계몽과 부흥 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사실을 외면하고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만 간단하게 기록하여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테러리스트로만 기억하고 있다.

앞으로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가 국사 교과서의 윤봉길 의사 관련 기록을 수정 보완하는 데에 사업의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