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향기는 시주(試酒)하기에 좋아라
맑은 향기는 시주(試酒)하기에 좋아라
  • 황미숙
  • 승인 2012.11.26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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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고려의 승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왕자로 태어나 승려가 된 의천은 고려의 불교가 교종과 선종으로 갈라져 대립하던 당시에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역설하였다.

고려의 교종을 통일한 후에 선종의 교리에 입각, 천태종을 개창하여 선종의 종파를 통합하였다.

원효의 중심사상인 ‘일불승(一佛乘)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원리에 입각하여 고려 불교의 융합을 실현, 한국 불교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또한 의천은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가장 수준 높은 화폐주조론을 펼쳤던 뛰어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당시는 쌀과 베가 화폐 구실을 했는데 그것은 곧 교환과 운반의 어려움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1101년 4월, 의천의 주장으로 돈을 만드는 일을 맡는 주전도감이 설치됐고, 이듬해 12월 해동통보(海東通寶)가 비로소 만들어져 실제로 유통되었던 것이다.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 1055∼1101))은 성은 왕 씨이고 본명은 후(煦)이며 자는 의천, 시호는 대각이다.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과 그 왕비 인예왕후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어머니가 용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탄생하였다.

그 때 향기가 궁 안에 가득하여 오랫동안 사라지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1059년 나라에서는 ‘한집에 아들 셋이 있을 때 그 가운데서 한사람만 중이 될 수 있다.

’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는 불교가 몹시 성행하여 나라의 국방력과 재정, 경제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이 초래됨을 염려하여 제정한 것이다.

그가 11세 되던 해에 아버지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 “누가 출가하여 복전(福田)이 되겠는냐.”고 물었을 때, 그가 스스로 출가를 자원하였다고 한다.

1065년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영통사에서 공부하였다.

왕사(王師)이자 아버지 문종의 외삼촌이 난원(爛圓) 밑에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오관산 영통사에서 화엄(華嚴)의 교관(敎觀)을 배웠다.

1065년 나이 13살 때에 의천은 ‘우세승통’으로 임명 되었다.

‘우세’란 승려의 별호이고 ‘승통’이란 승려에게 주는 최고관직이다.

1077년 처음으로 〈화엄경〉과 그에 대한 연구서를 강의했다.

의천은 불교전적을 수집하고 화엄학과 천태학의 교리상의 차이점을 알아보고자 중국 송나라에 유학할 것을 결심했다.

1084년(선종 1) 1월 유학을 허락해 달라고 국왕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이듬해 5월에 왕과 태후에게 편지를 남기고 몰래 제자 수개(壽介)를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7월에 송나라 서울 변경에 들어가 철종을 만나고 계성사에 머물렀다.

철종의 배려 아래 송나라의 양걸(楊傑)을 안내자로 삼아 지방으로 가서 불교에 대해 토론했다.

이어 천태종 승려 종간(從諫)을 만나 천태의 교관을 토론하고, 다시 혜인원에 가서 정원을 만났다.

혜인원에 머물 때 불교전적 7,500여 권을 기증하고 많은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원래 선종에 속했던 혜인원이 화엄종으로 바뀌었으며, 이름도 고려사라 하게 되었다.

이렇듯 의천은 1년 4개월 동안을 송나라에서 보내면서 50여명의 모든 종파의 고승들을 만나 불교에 대하여 토론했다.

의천의 이러한 활발한 교류와 불교전적 수집에 대하여, 당시 관직에 있던 소식은 몇 차례나 상소문을 올려 비판했지만, 송나라 조정은 오히려 의천을 환대했다.

고려에서는 《초조대장경》을 완성한 뒤에 의천을 중심으로 각국 고승들의 저술들을 모아 《속장경》을 편찬, 고려 선종 8년(1091)부터 고려 숙종 연간에 걸쳐 간행했다.

방대한 불경의 초판을 몇 해 사이에 끝냈다는 것은 고려의 출판 사업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의천의 노력이었다.

이와 같이 역사적 전통으로 고종 년간(1236~1251년)에 지금 해인사에 소장된 《팔만대장경》 경판을 초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의천은 판각본을 송나라와 요나라에 기증하여 3국간의 문화교류와 발전에 대해 공헌을 하였다.

세속의 부귀와 영화를 버리기란 쉽지 않고, 설사 그것을 버리고 출가한 이라도 진정으로 구도자의 길을 가기란 어렵다.

그런데 왕자로 태어나 출가하고 입적할 때까지, 오직 求法과 끊임없는 수행‧강학으로 일생을 살았던 대각국사 의천은 참다운 구도자였다.

그러기에 《中庸》에서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스스로의 정성으로 발명한 자(自誠而明者)’라 하였으니 대각국사를 두고 한말이리라. 대각국사 의천이 활동하던 시대는 고려에 불법이 전래 된지 700여년이 지났지만 교종과 선종으로 갈라져 대립하던 때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민주주의를 한다고 서로 외쳐대지만 누가 옳다는 겐가. 옳은 말이 있기는 한가. 그러나 누군가는 이 사회를 이끌어가야 하리라. 서로 잘하겠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들에게 구도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스스로 내놓은 말이라도 책임 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