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 황미숙
  • 승인 2012.10.1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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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
끝은 처음을 잉태한다.

모든 역사는 연결되어있다.

황하강가에서나 한강 주변에서 살다간 모든 인물들은 두 번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제 한강이 품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천하에 모든 일은 시작하는 순간부터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경순왕(敬順王, ?~ 978(고려 경종3), 재위 927~935)의 성은 김(金)씨. 이름은 부(傅)이다.

문성왕의 후손이며,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이다.

고려에 항복한 뒤에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와 다시 결혼하였다.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935년,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그가 고려에 귀의하자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다.

후에 고려 경종(景宗)의 장인이 되었고, 상보[尙父]로 상주국 낙랑왕 정승(上柱國樂浪王政丞)에 봉해졌다.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978년 경순왕이 승하하자, 신라 유민들은 경순왕을 경주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 조정은 “왕의 구(柩)는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하여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연천군 장남면(長南面) 고량포리(高良浦里) 성거산 자락에 장례를 하였다.

경순왕릉은 사후에도 수난을 겪어야 했다.

죽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경순왕은 외롭게 방치되었다가, 조선 영조23(1747) 때 ‘경순대왕장지(敬順大王葬地)’라는 지석(誌石)을 발견하여 능묘를 봉축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또 다시 잊혀졌다.

그러던 중 1973년 다시 발견되어 경내 일원을 보수하고 최근 민간인 통제구역에서 해제됨으로써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황금의 나라였던 천년 역사의 신라 935년 겨울, 경순왕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 때 왕자가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나 왕은 “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와 같아서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곧 시랑 김봉휴로 하여금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경순왕이 천년사직을 고려에 넘긴 것을 두고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국가를 내던진 무책임한 항복인가 아니면 백성을 우선으로 하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용단이런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대왕조에 “경순대왕께서 고려 왕건에게 양국(讓國)하신 일은 비록 마지못해서 한 일 이지만 옳게 하신 일이다.

그 때 만인 역전사수(力戰死守)하여 고려군에 항거하다가 힘이 꺾이고, 형세가 궁하여졌다면, 반드시 그 종족이 복멸(覆滅)되고 화가 무고한 백성에게 까지 미쳤을 것이다”라고 김부식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하늘이 신라이던 고려이던 백성들에게는 무엇이 중요했을까? 한 목숨은 부지하고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들이 이름을 바꾸는 것에 관심이 있었겠는가. 대선을 앞두고 있다.

연일 미디어는 시끄럽다.

무슨 이야기 인지 모를 말들이 넘쳐난다.

누가 어떻게 되었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들이 어디를 방문하고 누구를 찾아간다며, 언론들은 들끓어대고 설레발 치고 있다.

어느 후보를 어떤 장면으로 어떻게 노출시켜야 하는지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만들어 가는대로 민심은 졸졸 따라가고 있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