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속보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
  • 황미숙
  • 승인 2012.09.24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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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당나라 성신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
수천 년간 중국 역사에서 남성만이 최고의 통치자였다.

여성들은 수렴청정을 통해 황후나 태후의 신분으로 황제의 입을 빌려 정치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당나라 때에 최고의 통치권에 도전한 여성이 출현했다.

그녀의 등장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논쟁이 분분하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이다.

성신황제(聖神皇帝) 측천무후, 즉 무측천(武則天: 624~705)의 본명은 무조(武照),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였으나 고종이 죽은 후에 황제에 등극하였다.

황제로 16년간 재위하였지만 실제로는 50여 년간 집권을 한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황제이다.

태종(太宗)의 명으로 무측천은 13세에 궁에 들어가 재인(才人)이 되었다.

무측천이 황궁에 들어온 후 태종은 그녀에게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성격이 다소 거친데다 여자로서 애교를 부릴 줄 몰랐기 때문에 좀처럼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태종의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그녀는 649년 태종 사후 관례에 따라 자식 없는 다른 첩들처럼 감업사에 들어가 평생을 비구니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이듬해에 고종의 총애를 얻어 다시 입궁하여 2품 소의(昭儀)가 되었다.

그녀의 나이 이미 28세였다.

무측천은 고종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낳았으며, 655년 왕황후(王皇后)와 소숙비(蕭淑妃) 등을 내쫓고 황후(皇后)가 되었다.

무측천은 권력을 잡기 위해서 자식조차 스스로 죽이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일찍이 ‘건언12사(建言十二事)’라는 12조의 건의서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농업발전, 조세경감, 언론확대 등의 비교적 완비된 치국정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하라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683년, 고종은 황위를 태자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며, 이로써 태자 이철이 황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중종(中宗)이다.

그러나 중종이 즉위 후에 무측천을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자, 무측천은 중종을 폐위시켜 여릉왕(廬陵王)으로 강등한 다음 궁궐 깊숙한 곳에 유폐시켰다.

중종을 유폐시킨 후 무측천은 자기의 막내 아들 이단(李旦), 즉 예종(睿宗)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예종의 정사 참여를 배제한 채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고 모든 대소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그리고 황제의 등극을 향하여 순조로운 행보를 계속하였다.

이로부터 더 이상 그녀의 권세에 도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690년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을 기하여 무측천은 마침내 예종을 폐위하고 67세에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준비해 둔 도읍지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로써 그녀는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역사에서는 그녀를 ‘무주(武周)’라 일컫는다.

무측천은 만년에 이르러 황위를 자기의 조카 무승사에게 물려주려고 하였지만 재상 적인걸(狄仁杰) 등의 반발에 부딪혔다.

황위를 조카 무승사에게 물려주어 무씨 정권을 계속 유지시킬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아들에게 물려주어 다시 당 왕조의 황태후로 돌아갈 것인지, 무측천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미 74세의 고령이었던 무측천은 적인걸을 불러 이 문제를 의논했다.

“내가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큰 앵무새의 양 날개가 잘려져 있더군요. 경이 보기에는 이것이 무슨 징조인 것 같소?” 그러자 적인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측천에게 이렇게 말했다.

“폐하의 성씨가 ‘무’씨이니 그 앵‘무’새는 바로 폐하이시고, 양 날개는 바로 폐하의 두 자제분이십니다.

만약 폐하께서 다시 두 자제분을 기용하신다면 양 날개는 새롭게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 결국 중종을 다시 복위 시켜 국호는 다시 주에서 당으로 돌아왔으며, 무측천은 705년 눈을 감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린 교서에는 황제라는 칭호 대신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라는 칭호가 사용되었다.

무측천은 죽기 전에 자기의 묘비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금도 무측천의 묘비는 글자가 없는 비석으로만 남아 있다.

《맹자(孟子)》〈공손추상(公孫丑上)〉에서는 “힘으로써 사람을 복종하게 하는 것은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요.(以力服人者 非心服也 力不贍也) 덕으로써 사람을 복종하게 하는 것은 마음속으로 기뻐서 진정으로 복종함이다.

(以德服人者 中心悅而誠服也)”라고 하였다.

인간관계에서 무엇을 추구하는가는 각자가 정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상대로부터 인정과 관심 그리고 사랑 받기를 원할 것이다.

필요에 의해서만 만나지고 마는 관계는 자리를 떠나고 난 뒤에 직면하리라. 결국 삶의 후반전을 덩그러니 혼자 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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