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을 맞아 최고의 부귀를 얻다.
재앙을 맞아 최고의 부귀를 얻다.
  • 황미숙
  • 승인 2012.09.10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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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북위 풍태후(馮太后), 문명태후(文明太后)
북위(北魏, 386∼534) 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익숙하지 않은 왕조이겠지만, 세계의 석굴 가운데서도 그 규모뿐만 아니라 예술적 우수성을 자랑하는 대동(大同)의 운강(雲崗)석굴과 낙양의 용문(龍門)석굴을 개착한 왕조가 바로 북위다.

북위시대, 최고 권력자를 제거하고 새로운 실권자가 된 한 여인 풍태후(馮太后: 442~490)는 어린황제인 아들을 앞세워 무려 25년간 국사를 처리하였다.

풍태후은 원래 한족(漢族)이다.

할아버지 풍굉(馮宏)은 북연의 마지막 황제이다.

북연은 북위의 태무제(太武帝) 탁발도에게 멸망당한 후 풍굉은 고구려도 도망치는데, 고구려의 장수왕이 그를 죽여 버린다.

그녀의 부친인 풍랑(馮朗)은 북위에 귀순하여, 서역군공(西域郡公)에 봉해지며, 진주(秦州)와 옹주(雍州)의 자사를 지낸다.

449년, 그녀가 7세가 되던 해에 집안에 불행이 밀어 닥쳤다.

삼촌 풍막이 전쟁 와중에 유연(柔然)으로 투항을 한 것이다.

아버지 풍랑은 이 일에 연좌되어 죽음을 당했다.

망국의 왕녀에서 버림받은 여아로, 그리고 노비로, 그러나 18살(455년)에는 황제를 모시는 귀인(貴人)으로, 다시 그 이듬해에 황후가 된다.

역대 황조에서는 황제를 위하여 서로 먼저 아들을 낳겠다는 경쟁이 치열했다.

다만, 하나의 황조는 예외였다.

바로 북위였다.

“모두 왕이나 공주를 낳기를 원하지만, 태자를 낳기를 원하지 않는다.

” 왜냐하면 북위 황실은 황자가 태자에 오르면 생모는 반드시 죽여 버린다.

태자가 나이어린 것을 기화로 생모와 외척이 정치에 간여하거나 황위를 찬탈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7대에 걸쳐 시행되었으며, 1세기나 계속 되었다.

무고한 생모들의 죽음 위에 태자가 되고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입자살모(立子殺母)’의 규정에 따라 탁발홍(拓拔弘)의 생모인 이귀인(李貴人)은 죽임을 당한다.

풍황후는 탁발홍을 부양하며 태자를 친아들처럼 키웠다.

그러나 황후가 된 기쁨도 잠시, 곧 불행이 찾아왔다.

465년 남편 문성제가 죽고 이십대 초반에 과부가 된 것이다.

문성제의 죽음이라는 불행은 그녀에게 권력으로 향하는 계단이 되었다.

그녀는 24세에 황실 최고의 어른 황태후 자리에 올랐다.

문성제가 죽은 후, 헌문제(獻文帝) 탁발홍이 12살에 황위에 오르자 풍황후는 황태후가 되고, 승상 을혼(乙渾)이 조정을 총괄한다.

그러나 을혼은 황위 찬탈을 도모하다가 풍태후의 계책에 말려 죽임을 당하고 조정은 풍태후가 장악한다.

471년, 18살의 헌문제는 강압에 못이겨 5살 된 아들 탁발굉(拓拔宏 즉 孝文帝)에게 황위를 선양하고 자신은 태상왕이 된다.

그러나 헌문제 탁발홍은 병사를 이끌고 전장터를 누볐다.

이를 풍태후는 위협으로 느껴 23살의 헌문제를 독살한다.

그녀는 이제 태황태후의 신분으로 북위의 개혁을 추진한다.

476년 6월에 정권을 장악한 풍태후가 개각을 단행했을 때, 그녀는 남부상서(南部尙書) 이흔(李?)을 삼공(三公)의 하나인 사공(司公)에 특진 시켰다.

이흔이 누구인가. 자신의 정인(情人) 이혁(李奕)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 아닌가. 풍태후가 이혁을 잃고 비탄에 잠겨있었을 때, 이흔은 더욱 헌문제의 총애를 받았고,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헌문제가 독살되고 풍태후가 정권을 장악했을 때, 이흔은 자신 앞에 펼쳐질 운명을 직감했으리라. 그런데 막상 그에게 내려진 것은 사약이 아니라 범양공(范陽公)이란 작호였다.

그 다음에는 시중(侍中)에 임명 되었고, 이어서 서주자사(徐州周刺史)로 부임해 갔다.

이흔은 477년 2월 외반죄(外叛罪)로 주살 되었다.

이흔을 적대국이 송(宋)나라와 접경한 서주에 자사로 파견한 일은 그녀의 사전 작업이었다.

그녀는 끈기 있게 누군가가 이흔을 고발해 줄 때 까지 기다렸다.

왕조시대 허락 되지 않은 여성 정치가로서의 풍태후의 지모와 계략은 인내심이 그 원천이었으리라. 풍태후는 개혁사상을 지닌 인물들을 기용하고 관리를 정돈하며, 도량형을 통일하고, 삼장제(三長制)를 시행하여 백성의 호적을 정비하고, 균전제(均田制)을 시행한다.

풍태후는 선비족의 낙후한 국면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고는 하나, 결국 한화(漢化)정책은 북위를 멸망하게 하였다.

즉 풍태후의 개혁정책과 효문제의 낙양 천도는 선비족의 정신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맹자(孟子)》〈공손추하(公孫丑下)〉에서는 “시일과 간지 같은 천시가 땅의 이로움만 같지 못하고, 땅의 이로움은 사람의 화목함만 못하니라(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 라고 하였다.

우리네 삶은 하늘이 도와야 무슨 일이든 순조롭게 진행되어진다.

그러나 그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이다.

결국 철저히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는 주어진다.

자신만이 행운에서 비껴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내가 그만큼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리라. 즉 선택하고, 하지 않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