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藏經閣’에서 배운다
‘藏經閣’에서 배운다
  • 신아일보
  • 승인 2007.10.09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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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충 부산지방국토관리청

얼마전 김천 혁신도시 기공식에 참석했다 돌아오는 길에 짬을 내어 합천 해인사를 들렀었다.
일찌기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三災不入’의吉地로 꼽았던 가야산자락에 기품 있게 자리 잡은 法寶宗刹, 신라말 최치원이 절을 끼고 흘러내리는紅流洞계곡의 풍광에 반해 신발을 벗어던지고 표연히 사라져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해인사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건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대장경이 지닌 문화적 가치야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내가 특별히 눈 여겨 보았던 것은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大藏經板殿이었다.
흔히 藏經閣이라고도 부르는 이 건물은 해인사의 本殿에 해당하는 대적광전(大寂光殿) 뒷편에 자리잡고 있다. 장경각은 모두 네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장경판은 남북으로 나란히 앉은 수다라장(脩多羅藏)과 법보전(法寶殿)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고, 東西로 마주보고 있는 寺刊版庫에는 고승.대덕의 개인문집 등을 새긴 목판을 보관하고 있다.
장경각의 건축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세조 4년(1458년)에 원래의 판전 건물이 비좁아 확장공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15세기 초쯤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조선초기의 건축물 중에서도 건축양식이 빼어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는데, 의외로 아무런 장식이나 기교도 없고 처마도 서까래가 한 줄 걸린 홑처마건물로서 그 구조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장경각의 가치는 대장경 경판을 보존하는데 모든 촛점을 맞춘 기능적 측면의 우수성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우선 경판 보관에 절대적인 요건인 채광과 습도 및 통풍이 자연적으로 조절되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는 점을 꼽을수 있겠다. 장경각의 터는 토질 자체도 좋거니와, 바닥을 석회, 숯,소금을 이겨 겹겹이 다진 후 찰흙으로 마감하여, 여름철에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건조한 겨울철에는 습기를 내뿜어 적정습도를 유지하도록 하였다.
창문의 살창구조를 살펴보면 더욱 놀랍다. 각 건물에는 양쪽 벽에 아래위 2단으로 창을 내었는데, 남측 살창은 아래쪽이 크고 위쪽이 작은 반면 북측 살창은 아래쪽이 작고 위쪽이 큰 형태로 되어있다. 이렇게 하면 남쪽에서 불어들어오는 바람이 건물 내에서 원활하게 대류되도록 유도한 후 뒷면의 윗창으로 쉽게 내보낼수 있는데, 건조한 산풍과 습한 곡풍의 흐름을 치밀하게 계산한 결과물이다.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처마를 길게 빼어놓고, 건물을 빙 둘러 알맞게 경사진 배수로를 따로 파놓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선조들의 지혜가 곳곳에 배어있는 명품 건물인 것이다.이에 비해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해인사 경내에 그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절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대하게 되는 ‘구광루’의 축대를 새로 쌓는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매끈한 대리석 규격품을 척척 갖다 붙여놓은 꼴이 건물 자체의 은은한 풍모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그뿐인가? 대적광전 바로 왼편에는 새로 ‘비로전’을 짓고 있는데, 볼품없는 외양도 그렇거니와 대적광전에 혹처럼 들러붙어 전체 가람배치의 균형을 엉망으로 흐트러놓고 있다. 축대하나, 건물 하나를 지으면서도 아무런 의식이 없다는 증좌이다.
요즘 젊은 여교수의 가짜학위 파문과 사찰 특혜지원문제로 온통 시끄러운데, 그럴 리야 없겠지만 해인사도 곁다리를 걸쳐 돈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씁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