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곤의 봄’은 또 무산되나
‘양곤의 봄’은 또 무산되나
  • 신아일보
  • 승인 2007.10.06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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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세 열 본지주필

‘양곤의 봄날’은 또 무산되나 19년 만에 찾아온 미얀마의 민주화의 열망이 다시 꺾일 위기에 놓였다. 한반도의 3배가 넘는 비옥한 국토를 가진 나라 미얀마 국명은 ‘미얀마연방(Union of Myanmar)’이다. 영국 식민지 때부터 불리던 버마(Burma)라는 국호를 미얀마로 바꾸고 수도 랑군(Rangoon)도 양곤(Yangon)으로 변경했다.
세계 제1의 쌀 수출국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독립 후 계속 내전과 쿠데타 등으로 국민의 삶은 악화됐다 1960년만 해도 경제력에서 우리나라를 앞섰던 이 나라는 거듭된 군사 독재로 반세기 가 지나도록 국민소득 175달러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우누 총리가 집권하면서 ‘불교사회주의’를 제창했는데 이념 종교의 대립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계속됐다.
상황을 진정 시키며 국가의 방향을 ‘버마식 사회주의’로 설정한 네원의 통치 하에 미얀마는 질서 있는 국가의 모습을 갖추는 듯했다. 이 때문에 미얀마는 군부의 나라로 변했다. 모든 재원은 군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군부는 국민의 불만을 갖지 못하도록 외부 세계와 단절했다. 국민의 눈과 귀를 막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1000년 넘게 신주처럼 받들어온 불교의 독경소리를 더욱 높이면서 정신적 가치만 주입했다.
미얀마는 주류인 미얀마 족과 이들이 믿고 불교 외에도 다양한 언어 관습 종족 불교가 산재한 나라다. 이런 배경에서 승려들은 정권창출 과정의 시시비비보다는 정권이 자신들을 얼마나 잘 돌보아 주는가 에 관심이 많았다. 이들은 정권이 보호하고 후원하는 대가로 사회통합기능을 수행했다.
현재 군부정권인 국가 평화발전위원회(SPDC)가 정권창출의 불법성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승려를 만족시키는 방법으로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던 점에서도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미얀마 정치상황의 변화는 승려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미얀마의 이번 반정부 시위는 1988년 민주화운동 이후 최대 규모이다. 독재군부가 민초들의 시위에 강경 진압으로 대응 유혈참사가 빚어지고 있다. 연료비 대폭인상으로 촉발된 미얀마 반정부 시위가 승려주도에서 학생 일반 시민들까지 가세한 민주항쟁으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미얀마에서 승려들은 그동안 사회 정치적 격변의 중심에서 왔다. 영국의 식민통치시절은 물론 군부 독재에도 과감히 맞섰으며 1988년 민주화 봉기 1990년 시위 때에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국민 대다수가 불교를 믿고 미얀마에서 승려들은 국민의 절대적 존경을 받는 존재이다.
군인들이 제나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행위는 ‘내정불간섭 원칙’의 대상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공적이다.
피플 파워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나 군부와의 충돌 없이 민주주의로 진행한 나라들도 있고 엄청난 피를 흘리고도 독재정치가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1986년 필리핀 1987년 광주 민주화 항쟁 , 1988년 미얀마양곤의 봄, 1989년 중국 턴안먼 사태가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지금 미얀마는 그 갈림길에 서있다 .
오늘의 미얀마는 ‘공포가 일상이 된 나라’라고 외신들이 전하고있다. ‘어용깡패’들이 판치고 밤이고 새벽이고 아무 때나 보인 대로들이 닥쳐 최소한의 인권도 인간적 존엄성도 허용되지 않은 나라다 돌이켜 보면 오늘날 미얀마 사태는 주변국가들의 책임이 크다. 미얀마는 1988년 민주화를 이룰 절호의 기회를 맞았으나 무산됐다.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국가 연합이 석유와 가스를 탐내 기회주의적으로 처신 한 것이 한 요인이다. 특히 중국은 미얀마군부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나서서 미얀마 군부정권을 제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안보리상임이사국인 중국은 여전히 난색을 표한다.
미얀마 국토에는 석유 목재와 3모작 가능한 쌀 농사 등 자원의 부국이다. 그럼에도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한 네원은 폐쇄주의 적 사회주의체제로 나라를 끌고 가 오늘날 세계최빈국으로 전락했다. 1988년 반정부 시위 진압과정에 3000여명의 사망자를 내고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1990년 아웅산 수치여사가 이끄는 야당 연합이 압승을 거둔 선거를 무효화했다. 그 이듬해 수치여사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국제사회의 미얀마 군부 비토였으니 군부는 민주민족동맹을 불법화하고 수치여사를 12년 간 연금 해왔다.
이번 사태를 유혈 진압한다면 미얀마 군정은 국제사회고립을 넘어 스스로의 종말을 앞당기고 만다는 것이 세계역사의 생생한 체험이다. 우리는 미얀마보다 1년 앞선 1961년 쿠데타를 겪었지만 경제개발과 국제무역을 선택해 가난을 극복했고 1987년 피플파워를 통해 순조롭게 민주화로 이행 됐다.
그러나 한반도의 북쪽에는 빈곤과 독재정치에서 미얀마를 닮은 체제가 있다. 그래서 미얀마사태를 강 건너 불구경하 듯 해서는 곤란하다. 우리의 민주화 성취 과정에도 국제사회의 여론과 감시의 힘이 적잖았다 그런데도 비슷한 군사독재의 탄압에 맞서 민주화를 이룬 우리다 미얀마에 대한 문제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총부리 앞에 나서는 저들의 비장한 모습 앞에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눈물을 흘렸던 우리가 어떻게 더 이상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