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독립운동가 정환직 선생 선정
8월 독립운동가 정환직 선생 선정
  • 신아일보
  • 승인 2007.08.0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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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일제의 회유책 뿌리치고 장렬히 순국
1907년 일제의 회유책 뿌리치고 장렬히 순국
보훈처, 순국100주년 맞아 독립운동가로 선정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일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투쟁은 다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산남의진(山南義陣)은 신돌석 의병부대와 더불어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의병부대였다. 정환직선생은 산남의진을 이끌다가 순국하셨으며 이에 국가보훈처는 선생이 순국하신지 100주년을 맞아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경북영천 출신으로 12살 때 지방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할 정도 총명했다. 선생은 1887년 북부도사(北府都事)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아가 1888년 의금부 금부도사(禁府都事), 1894년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토포사(討捕使), 1899년 삼남검찰 겸 토포사·시종관, 1900년 원수부위임(元帥府委任) 겸 3남관찰사·도찰사(都察使),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등을 역임했다. 선생은 관직에 있을 때도 일제의 주권침탈에 맞서는 방책을 추진했지만 일제가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의 강점을 노골화 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반일무장 투쟁만이 국권회복의 길임을 깨닫고 의병부대의 선봉장이 되었다.
산남의진은제1차(1906.3~7), 제2차(1907.4~8), 제3차(1907.9~12), 제4차(1908.2~7)에 걸쳐 3년간 반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선생은 자신의 판단과 전민족의 대일항쟁을 촉구하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제1~2차 활동시기에 큰 아들 의병장 정용기(鄭鏞基)를 지도했고 제3차 활동시기에는 직접 의병장으로 나섰다. 정용기가 일제와 싸우다 순국하자 선생은 의병장으로 일제의 군대, 헌병분견소 등을 습격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선생은 1907년 12월 11일 고천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일제의 간교한 회유책을 뿌리치고 장렬히 순국하셨다.
산남의진은 우리 의병전쟁사에서 근왕주의적 성격을 벗어나 전민중적 기반 아래 전국적 의병부대의 연합작전을 선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 활동시기는 의병투쟁이 가장 치열하게 고조된 때로 이후 만주지역의 무장투쟁운동으로 이어지는 반일무장투쟁사에 자리매김 된다. 이러한 의진의 선봉에 정환직 선생이 있었다.
정환직은 옥중에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 =△身亡心不變 (몸은 죽으나 마음은 변치 않으리) △義重死猶輕 (의리가 무거우니 죽음은 오히려 가볍다) △後事憑誰託 (뒷일은 누구에게 부탁할꼬) △無言坐五更 (말없이 앉아 오경을 넘기노라)=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장에 추서했다.
김삼태기자
stkim@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