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0년 여름, 황산벌
서기 660년 여름, 황산벌
  • 신아일보
  • 승인 2007.07.05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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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역사에서 참으로 중요한 군사 유적지인데도
현재까지 문화재 지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

서기 660년 여름, 황산벌은 뜨거웠다. 이른바 삼영(三營)에 진을 치고 적을 기다리는 백제 5천 결사대의 혈기와 이에 대응하여 삼도(三道)를 통해 진격 중인 신라군의 거친 숨소리로 7월의 짙푸른 벌판은 초목도 불태울 만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처자의 목숨을 거두고 전장에 나온 계백은 “분연히 결전하여 국은에 보답하자”며 부하들에 맹서하였다. 이에 힘입은 백제군은 신라군 5만을 당하여 네 번을 이겼다. 그러나 화랑 관창과 반굴의 용감한 죽음으로 전세가 바뀌었다. 역시 중과부적이었다. 결과는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며 장렬한 최후를 맞은 계백과 5천 결사대의 패배였다. 때는 음력 7월 9일, 678년의 위대한 백제역사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2007년 여름, 지금 황산벌은 예년보다 이른 더위로 뜨겁기만 하다. 오락가락하는 장맛비 속에 백제군이 진영을 설치했던 산야와 신라군이 진격을 했던 들길은 녹음방초로 뒤덮였다. 여기에 뿌려진 계백과 백제 군사들, 관창과 신라 군사들의 피는 흔적조차 없다. 이따금 꾸욱꾹 우는 멧비둘기가 그들의 의로운 영혼을 위로할 뿐이다.
그렇다고 어찌 역사가 사라지랴? 그 황산벌 어느 산기슭에 계백 장군은 웅혼한 충정을 후세에게 가르치며 잠들어 계시다. 바로 우리 논산시 부적면의 ‘충장산’(忠壯山) 또는 ‘수락산’(首落山)이라 불리는 곳이다. 혹자는 이곳이 정말 계백의 묘소가 맞는지 의심스러워한다. 하지만 사료적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고 해서 신빙성이 높은 역사 유적지를 굳이 아니라고 부정할 필요가 있을까?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로서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역화 지역으로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데 말이다.
이제 이러한 유적은 우리 스스로가 역사적 의의를 살려나가야 한다. 사실(史實)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통해 그 가치를 길러가야 한다. 이것이 곧 민족 역사를 피상적이고 의존적이 아닌, 구체적이고 자주적으로 해석하여 우리 안에 끌어들이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이를 계기로 역사의 주체로서 자긍심을 갖고 진취적인 미래를 열어 갈 수 있는 원동력도 얻게 됨은 물론이다.
우리 시에서 계백장군 묘소의 성역화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묘역 정비에 이어 2002년에는 사당과 삼문, 그리고 홍살문을 건립하였다. 2005년에는 백제군사박물관도 개관하였다. 현재는 박물관을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끼며 여가도 즐길 수 있는 가족형 테마공원으로 꾸미기 위해 호수공원과 휴식공원 조성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이곳 황산벌의 역사성을 정립하는 작업이 아직 미진하다는 점이다. 후백제의 신검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곳으로도 알려져, 삼국시대 역사에서 참으로 중요한 군사 유적지인데도 현재까지 문화재 지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물론 지역이 방대하고 위치에 대한 명확한 고증도 어렵다지만 관계되는 우리 모두의 관심이 부족함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시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이제부터라도 관련 기관이나 학계, 그리고 시민들이 함께 지혜를 모은다면 성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한 나라의 운명을 가르고 민족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었던 황산벌을 1347년 전 여름, 그 뜨거웠던 역사의 현장으로 되살려 놓아야 하는 것이다. 비록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지만 후세들의 노력에 따라 역사의 자취는 다시금 새롭게 조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