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규의 한국성씨를 찾아서16-동래정씨(東萊鄭氏)
정복규의 한국성씨를 찾아서16-동래정씨(東萊鄭氏)
  • 정복규
  • 승인 2011.10.04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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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항은 청백리로 이름 높아 고려사에 오른 인물
정인보.정진숙.정범모.정석모.정한모 등이 후손


시조 정회문(鄭繪文)은 고려 때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다.

1세조는 고려 때 호장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이다.

그 후 안일호장을 지낸 정문도(鄭文道)를 중시조로 한다.

후손들이 동래에 터를 잡으면서 동래를 본관으로 삼았다.

정 항은 청백리로 이름이 높아 고려사에 오른 인물이다.

30년 동안 벼슬을 지내고 죽었으나 초상 치를 한 섬의 곡식조차 없었다.

왕이 그의 청빈함에 놀라 쌀 1백 섬과 베 2백 필을 하사하고 친필로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정 서는 국문학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고려 인종과 동서 간으로 내시중랑을 지냈으나 의종이 즉위한 뒤에 모함을 받아 동래로 귀양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임금을 그리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후대 사람들이 이 노래에 그의 호를 붙여서‘정과정곡’이라 불렀다.

세종 때 벼슬길에 오른 정갑손은 청렴결백하고 서슴지 않는 직언으로 이름이 있었다.

그의 동생 정창손은 세조의 집권에 참여한 공으로 세조, 성종 대에 벼슬이 크게 올라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성리학자인 그는 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고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성종 14년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외교가로도 수완을 보였으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원각사비 글씨는 바로 그가 쓴 것이다.

그의 네 아들 중 정광필은 중종 때 영의정에 오르고 당시에 어진 정승으로 추앙된 인물이다.

그는 기묘사화 때 조광조 중심의 사림세력이 모두 화를 입을 때 임금의 노염을 사면서도 이상파 소장학자들을 두둔, 희생을 막았다.

그의 집은 당시 서울 남산 아래 회동(지금의 회현동)에 있었다.

이곳을 근거지로 정씨 일가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으며 그 후 이들을 회동정씨라 불렀다.

선조 22년(1589) 기축옥사 때 죽음을 당한 정여립도 후손이다.

이 사건으로 동래정씨 집안은 고향에서 쫓겨나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조상들의 무덤은 모두 파헤쳐져 다른 곳으로 이장됐다.

정여립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그가 속한 문중 전체가 수백 년 동안 족보에서 사라졌다.

일제침략의 난세 속에서 5천 년 간 이어온 조선의 얼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정인보도 후손이다.

유학자이자 사학자인 그는 해방 이전에는 연희전문(연세대), 이화여전(이화여대) 등에서 국문학을 강의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지낸 정양모씨는 정인보의 아들이다.

을유문화사 사장 정진숙씨는 8.15 이후 우리말 큰사전(6권)을 맨 처음으로 펴내 우리말 바로잡기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부산 성창목재 회장 정태성씨도 후손이다.

행정부에서는 정한수(전 노동부장관, 농수산물유통공사 이사장), 정진동(전 교통부장관), 학계에서는 정범모(한림대 교수), 정진황(대전신학대 학장)이 두드러진다.

정진길(국회의원), 동양방송 편성부장과 불교방송국 전무를 지낸 정인섭, 정달영 한국일보 편집위원도 있다.

정범모씨는 철학박사로 서울사대 학장, 충북대 총장, 한림대 교수를 지낸 학계의 원로다.

정석모씨는 10대, 11대, 12대, 13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내무부장관과 민정당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정진우, 정현식씨 등은 변호사로, 정종식씨는 대검 공안부장으로 활약했다.

문예진흥원장을 거쳐 전 문공부장관을 지낸 정한모씨도 후손이다.

(무순, 전현직 구분이 안됐음) 집성촌은 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723명이 있다.

인구는 2000년 현재 442,363명이다.

서울 79,195명, 부산 57,457명, 대구 45,327명, 인천 16,037명, 광주 4,557명, 대전 12,814명, 울산 15,149명, 경기 66,998명, 강원 7,089명, 충북 13,085명, 충남 15,212명, 전북 26,105명, 전남 5,640명, 경북 35,518명, 경남 35,885명, 제주 6,295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