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현판
광화문 현판
  • 박 태 건 국장
  • 승인 2011.01.0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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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문이며 정문이다.

경복궁의 창건시에는 특별한 이름없이 ‘정문'으로 부르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집현전의 학자들에 의해 성문과 다리 등에 이름을 붙이면서 비로서 ‘광화문' 이라 부르게 되었다.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보여주는 문'이라는 뜻의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에서 유래된 것이다.

조선 시대엔 백성들의 궁궐 출입이 쉽지 않았을 터이니 광화문은 왕권의 존엄들 보여주는 궁의 얼굴이었다.

6·25 동란으로 육축 상부 문루(목조부)부분이 소실된 것을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68년 공사비 1억5천만원을 들여 2백72일 만에 철근 콘크리트로 광화문을 복원하면서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 쓴 ‘광화문' 한글 현판을 걸어 제막했다.

언뜻 보면 광화문 복원과 그 현판 복원은 문화재 복원이란 측면에서 상통하는 면이 없지 않다.

이후 문화재청은 지난 2005년 벽두부터 광화문이 경복궁의 중심축에서 어긋나게 세워져 있어 일제에 의한 역사왜곡을 바로잡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광화문을 복원하면서 문루에 내건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한글 현판이 군사독재의 얼굴로 비춰지므로 조선 정조 글씨 한자 현판으로 바꾸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조 글씨로 복원하는 것에 대해 많은 반대 여론이 생기자 급하게 그 원형을 찾던 중 일제시대 광화문 유리원판 흑백 사진의 이미지를 발견하고 디지털 기기로 판독해 그 글씨를 복원하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광화문 복원 공사는 2006년 12월4일부터 이뤄져 지난해 8월15일 광복절에 복원 공개됐다.

하지만 완공 후 불과 3개월만에 광화문 현판에 금이 가면서 균열 문제로 수난을 겪고 있다.

개방 일정을 앞당기면서 나무가 덜 말라서 생긴 부실 공사니, 부적합한 목재를 사용했느니 여러가지 원인들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더해 아직도 한글 현판이냐, 한자 현판이냐 논란이 일고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하루빨리 국민들의 마음 속의 광화문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