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진의 Why not] 가까운 미래, 노인들만 사는 나라
[주진의 Why not] 가까운 미래, 노인들만 사는 나라
  • 주진 정치사회부장
  • 승인 2023.03.25 15: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강 작가의 <그래스프 리플렉스>, '초고령화사회'에서 벌어지는 생명‧권력‧부를 향한 인간의 욕망과 세대 간 갈등 그려내
 

 

“올더앤베러, 나이가 들수록 삶은 나아져야 합니다. 그들이 만든 세상에서 그들이 누리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김강 작가의 <그래스프 리플렉스> 43쪽 중에서)

김강 작가의 <그래스프 리플렉스(Grasp Reflex)>는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미래 사회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노인들은 나라에서 주는 소득만으로 먹고 산다. 노인들은 심장 콩팥 간 췌장 등 대부분의 장기를 인공으로 교체 가능해 백삼사십세까지는 너끈히 살 수 있다. 노인들의 표만으로도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인, 노인들만을 위한 제품을 만들어 사업을 해도 최대 재벌이 될 수 있는 기업인, 노인들을 위한 로봇을 수리하고, 수명 연장을 위한 인공장기 밀매를 벌이는 청년들이 노인만을 위한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권력과 부는 죽지 않는 자들의 것, 노인들은 손에 쥔 것을 결코 내어놓지 않는다. 그들을 바라보는 자식들. 자식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뿐이다. 노인이 되기까지 30-40년을 기다리거나 아님 그들이 죽기를 기다리거나. 청년에게 한 노인이 말한다. “기다려. 자네도 언젠간 늙을 거 아냐?”

“다음 선거에서는 무조건 노인들에게 혜택을 많이 주겠다는 당을 찍어야 해. 기사 양반도 언젠가는 늙을 것 아니야. 그때를 생각하면서 지금 잘 판단해야지. 길게 보고 표를 줘야 해. 노인들 표에다가 기사 양반 같은 젊은 표까지 합치면 안 될 일이 없지. 그렇지 않아? 하긴 젊은 사람들 표까지 필요하겠어? 노인들 표만 제대로 모여도 충분하지. 아무렴.”(116쪽)

소설 속 인물인 여당 실세 국회의원 김영권은 노인들의 표심을 사기 위해 국민기본소득을 부결시키고 노인기본소득으로 바꿔서 통과시켰다. 정치를 시작한 이후 7번의 선거에서 5번 당선됐고, 그중 2번은 정치권 물갈이 열풍에 불출마로 자세를 낮춘 덕에 정계에서 살아남아 차기를 노렸던 것이다. 영원할 영(永)에 권세 권(權), 즉 영원한 권력이라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처럼 내각제로의 개헌을 통해 합법적으로 영구집권을 꿈꿨다. 그런 영권은 20여 년째 지역구를 관리하던 아들이 정계에 진출하겠다고 하자, 그가 평생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못 박는다. 

'그래스프 리플렉스'는 생후 2~3개월 영아의 손바닥에 손가락을 갖다 대면 아이가 꼭 잡는 '쥐기 반사' 혹은 '파악 반사'라고 일컫는 의학용어이다. 생명 유지를 위한 원시 반사의 일종인데, 이 책에선 생명을 향한 인간의 본능과 끝없는 욕망을 상징하고 있다. 김강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욕망으로 부를 쌓아올린 자본주의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 이 책은 노인들을 위해 청장년은 언제까지 희생하면서 그들을 부양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최근 정치권에선 연금개혁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다시금 떠올랐다. 지금 연금개혁을 하지 못하면 기금고갈 이후에도 노인 세대에게 연금을 주기 위해 미래세대가 엄청난 보험료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4차 재정 추계결과에 따르면 국민연금 기금은 2041년에 최고에 도달한 후 빠르게 줄어들어 2057년에 바닥을 드러낸다. 연금이 고갈돼 지급하지 못하는 사태를 막으려면 재정 운용방식을 현행 부분 적립방식에서 이른바 '부과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부과방식은 해마다 그 해 필요한 연금 재원을 현재 근로 세대한테서 그때그때 보험료로 걷어서 그 보험료 수입으로 노년 세대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5차 재정계산을 담당한 국민연금재정추계전문위원회에 따르면 기금고갈로 적립방식에서 부과방식으로 국민연금 운용방식을 변경해도 현행 40%의 소득대체율을 지속하려면 보험료율(부과방식 필요보험료율)이 2060년 29.8%, 2070년 33.4%, 2080년 34.9%에 달해야 한다.

현재의 보험료율 9%와 비교하면 3배 이상으로 높다. 다시 말해 미래세대는 국민연금 보험료로만 소득의 30% 이상을 부담해야 하는 등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말이다.

오랜 경기 침체 속에서 사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청년실업도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는 또 다른 요소다. 우리나라 실질 청년실업률은 이미 20%를 넘고 있다. 저성장 고물가 시대,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많은 청년들이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다.

최근 통계청 자료를 보면 지난달 60세 이상 취업자는 577만 명으로 2월 기준 역대 최대를 기록했지만, 20대 이하 청년(15∼29세) 취업자는 12만5000명 급감해 2년 만에 최악의 감소세를 보였다는 상반된 결과가 나왔다. 게다가 구직 활동도 하지 않고 ‘그냥 쉰다’는 청년층이 50만 명에 육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상 최대다. 이처럼 고령 취업자는 수십만 명씩 늘어나는 데 비해 청년층 취업자는 계속 줄고 있는 것이다. 

고령 근로자를 위한 정년 연장, 임금피크제 등 일자리를 둘러싸고 세대 간 갈등이 첨예해지는 것도 청년실업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어쨌든 젊은 사람들이 불쌍해. 나는 사실 요즘 버스 타는 것도 미안해. 젊은 사람들한테. 우리가 하는 게 뭐 있나? 맨날 먹고 놀면서 시간 보내는 거잖아. 돈 한 푼 안 내면서 버스도 타고, 강의도 듣고, 놀러 다니고, 매달 통장에 돈도 들어오고. 그거 다 젊은 사람들이 낸 세금이잖아. 염치없이 받아먹기만 하는 것 같아서 영 맘이 편치 않아. 이러자고 늙은 것은 아닌데 말이야.”

“우리가 공짜만 쫓아다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 마. 우리도 젊었을 때 열심히 일했거든. 세금도 많이 냈고.” (<그래스프 리플렉스> 195쪽 중에서)

노인 일자리든 청년 일자리든 기업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해법이지만, 정부와 정치권이 머리를 맞대고 노인 세대의 노후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국가 미래를 책임질 청년들의 꿈을 북돋는 일자리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노인세대와 청년세대는 경쟁 상대가 아니다. 노인의 경륜, 청년의 창의성과 꿈을 모두 함께 담아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jj72@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