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프랑스로 간 ‘조선왕실의궤’
일본과 프랑스로 간 ‘조선왕실의궤’
  • 오세열
  • 승인 2010.02.1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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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조선의 순종은 왕실소장의 각종 도서를 한데 모아 규장각(奎章閣)도서로 통합 하도록 했다.

규장각은 정조가 1776년 즉위 하자마자 창건한 기구로 역대 군주의 유품과 각종 서책을 보관했다.

정조는 1782년 강화도에 별도로 외규장각을 설치했다.

외규장각 도서 가운데 200여점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때 프랑스군대가 강탈해 갔는데 아직도 반환되지 않고 있다.

파리 행정법원이 지난해 말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라는 시민 단체 문화연대의 소송을 기각 했다는 뉴스가 뒤늦게 전해졌다.

프랑스 법원의 논리가 가관이다.

법원은 ‘외규장각 도서는 프랑스 국가 재산이며 취득상황과 조건은 국가재산 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프랑스 정부 대변인은 재판과정에서 ‘불행한 약탈’을 통해 이규장각 도서를 보유하게 됐다고 인정했다.

프랑스 법원의 주장은 ‘약탈한 물건을 자기 이름으로 등제 하면 강도행위에 관계없이 자기재산이 된다’고 우기는 것이나 마찬 가지다.

문화국가임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양심을 의심케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판결은 논리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프랑스가 가입한 ‘전쟁약탈 문화재반환에 대한 파리협약’등 각종 국제협약을 불법적 취득에 의한 해외반출이나 수출시 반환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프랑스는 또 병인양요가 일어난 1866년 무렵에는 약탈행위를 금지하는 국제규범이 형성됐다고 보기 힘들다며, 견강부회식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조선을 침략했다가 퇴각하면서 왕실서고를 털어간 행위가 약탈이 아니고 무엇인가? 유네스코 산하 ‘문화재 반환 촉진 정부간 위원회(ICPRCP)’가 2008년 ‘불법적으로 약탈한 문화재는 원 소유국에 되돌려 줘야한다’며, 채택한 선언문도 무시했다.

프랑스는 1993년 9월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대통령의 방한 때 한권을 돌려준 뒤 갖가지 이유를 들어대며 반환협상을 피하고 있다.

그래서 문화연대의 반환 소송은 모금한 3억4000만원으로 싸웠다.

2007년 3월에는 1억원을 들여 프랑스의 대표신문 르몽드에 반환을 호소하는 광고를 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민간단체에 맡긴 채 정부는 수수방관 해오며 이 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만들어 되찾겠다는 전략적 접근이나 의지도 없이 17년째 프랑스에 끌려 다닌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이번에는 일본왕실 업무를 담당하는 궁내청 내에 조선왕실 의궤(儀軌)를 비롯해 의학 관습 군의역사 관련 서적과 왕이 교양을 높이기 위해 받던 경연(經筵)에 쓰인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아사이 신문이 보도 했다.

이는 이미 국내 서지학회가 조사에 나서 궁내청에 보관된 636종 4678권이 우리 옛 전적(典籍)목록을 9년 전에 작성한 바 있다.

명성왕후 국장(國葬)과정을 기록한 왕실 의궤는 물론 17권 57점의 의학서적도 여기에 포함 돼있다.

문화재청 집계에 따르면 지난연말 현재 해외의 한국문화재는 18개국에 총 10만 7857점이나 된다.

외규장각 도서 같은 문화재와 정상적인 수집활동을 통해 반출 된 유물이 함께 들어있는 목록이다.

우리가 궁내청 보간 사료에 새삼 주목하는 것은 정상적인 반출이 아니라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긴 상태에서 멋대로 일본에 넘겨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외규장각 도서처럼 사실상 강탈당한 문화재로 보아야한다.

200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됐을 정도로 극히 귀중한 문헌인 조선왕실 의궤 중 하나인 명성 국장도감 의궤의 경우 1922년 조선 총독부가 궁내청이 ‘기증’한 것으로 돼있다.

남의 것을 자기네들 끼리 주고받는 셈이다.

지난 17대 국회가 ‘일본소장 의궤 반환촉구 결의안’을 채택했고 이번에는 이정현 의원 등이 나서서 같은 결의안을 추진 하고 있다.

일본은 올해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한 일 관계를 모색한다면 비정상적으로 앗아간 문화재 반한을 출발점으로 삼아야한다.

제발 프랑스 법원처럼 ‘국유재산’이라는 식으로 강변하거나 다른 핑계 거리를 짜내려 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