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임신 초기 여성에겐 멀고도 험한 ‘임산부 배려석’
[기자수첩] 임신 초기 여성에겐 멀고도 험한 ‘임산부 배려석’
  • 이상명 기자
  • 승인 2021.10.1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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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면 분홍색으로 된 ‘임산부 배려석’이 칸칸마다 마련돼 있다. 각종 홍보를 통해 임산부 배려석은 만삭의 여성뿐 아니라 임신 초기의 배가 나오지 않은 임산부도 앉을 수 있는 자리라고 알려져 있다. 임신 초기 또한 만삭 임산부가 겪는 현상인 만성적 전신 피로, 두통, 현기증 등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무리 힘들고 지친 하루였다 하더라도 분홍색 임산부 배려석은 비워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약 한 달여 전 아침 출근 시간, 지하철을 타고 서서 출근하는 내 배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한 아주머니가 임산부 배려석도 아닌데 벌떡 일어서더니 자꾸 앉으라고 했다. ‘같은 여자라서 임신 초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안다’면서.

그러나 나는 임신 초기 여성이 아닌데다 그저 아랫배가 전신에 비해 조금 나와 있는 여성일 뿐. 당황한 나는 “감사하지만 임산부 아니에요!”하고는 다른 칸으로 이동하고 말았다. 너무나 배려심이 투철한 분은 간혹 이렇듯 타인을 당황하게도 만든다. 물론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그로부터 약 20여 일이 흐른 어느 날 퇴근길 내 컨디션이 바닥을 보였다. 순간 분홍색 임산부 배려석이 눈에 들어왔고 양심과 힘듦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하던 차 어차피 사람들이 임산부로 오인하는데, 그리고 나는 지금 굉장히 힘든데 비어있는 자리 조금 앉아서 간다 한들 누가 뭐라 할 것인가 하는 악마의 판단을 하고 말았다. 급기야 아주 당당한 자세로 임산부 배려석에 착석했다.

두어 정거장쯤 지났을까. 진정 임산부인 만삭의 여성이 하필이면 내가 탄 칸의 그 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내 아랫배는 임신 초기처럼 보였지만 만삭의 여성은 누가 봐도 임산부 아니던가. 양심의 한 부분이 찔려오는 순간, 옆자리 아주머니가 내 왼팔을 흔들었다. “저기요, 이제 그만 일어나요. 임산부 탔네”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들켰다’는 창피함과 함께 ‘아니, 내가 진정 임신 초기 여성이면 어쩌려고 이런 말을 하지?’ 욱!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임산부 지인들이 한결같이 임신 초기에는 눈치가 보여 임산부 배려석이나 노약자 보호석에 앉기가 힘들다는 하소연이 많았다. 임산부 배려석이 만들어 지기 전 노약자석은 노인, 어린아이, 임산부가 대상이었음에도 어르신들은 젊은 임산부들이 앉으면 일어나라고 소리치기 일쑤였다. 한 지인도 비오는 날 한 어르신이 우산 꼭대기로 배 부분을 콕 찌르며 “일어나. 젊은 것이 왜 앉아있냐”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같이 탄 배우자가 “임산부입니다!”하며 소리치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봉변을 당했을 거라면서.

나도 모르게 진짜 임산부는 아니었지만 옆자리 아주머니에게 항변을 하고 말았다. “초기 임산부도 힘들고 피곤한 건 마찬가지라는 말 못 들었어요? 같은 여자면서 그것도 몰라요? 아주머니 같은 분 때문에 임신 초기 여성들이 눈치 보여서 이 자리에 못 앉는 거 아니에요!”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내 외침에 임산부 배려석이 아닌 다른 자리에서 만삭 임산부 여성에게 자리를 양보했고, 내 옆자리 아주머니는 조금 당황한 듯 다음 역에서 내리고 말았다. 또다시 임산부 배려석은 공석으로 남았다. 몇몇 사람들이 괜찮으니 다시 앉으라고 했고, 그 칸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 내 아랫배에... 임신했다고 하지는 않았으니 거짓말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진짜 임신 초기 여성이면서 위험한 기간인 임신 4주차 정도였다면. 옆자리 아주머니의 이 같은 반응이 얼마나 서운했을까 하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자칫 진정 분홍색 임산부 배려석이 필요한 여성에게도 ‘거짓 임신 여성’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아직도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볼 때다.

vietnam1@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