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사랑 내곁에,점수는 별 세개?
내사랑 내곁에,점수는 별 세개?
  • 신민아기자
  • 승인 2009.09.20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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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팅 당시만 해도 크게 주목받는 배우가 아니었던 김명민, 하지원은 개봉 시점에서 영웅이 됐다.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 이은 김명민 다큐멘터리, 영화 ‘해운대’가 터닝포인트다.

개봉을 앞둔 지금, 김명민은 ‘김본좌’가 됐고 하지원은 1000만 배우 반열에 올랐다.

다큐멘터리, 무릎팍도사 등으로 탄력 받은 홍보 마케팅은 적확했으며 절묘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내사랑 내곁에’의 냄비 뚜껑이 열렸다.

‘너는 내운명’, ‘그놈 목소리’를 만든 박진표 감독의 작품이란 점도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에 무게를 더했다.

루게릭병에 걸린 남자 ‘종우(김명민)’와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여자 ‘지수(하지원)’가 주인공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그 상실에서 오는 슬픔은 뻔하고도 지당하다.

하지만 상실과 죽음의 메시지를 관객들이 공감케 하려면 이야기가 받쳐줘야 한다.

박 감독은 그 가교 역할로 ‘헌신’이란 코드를 택하고 있다.

너는내운명 때도 그랬고, 내사랑내곁에에서도 마찬가지다.

내사랑내곁에는 상당히 직접적인 방식으로 관객에게 눈물을 요구한다.

신(#) 제목 자체를 ‘슬픈 대목’으로 명명할 수 있을 정도다.

슬픈 대목이라서 슬픈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잽 잽 원 투’로 날아든다.

연출 의도에 집중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낚일 수밖에 없다.

슬프라고 만들었기 때문에 슬픈 장면들은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김명민은 피골이 상접하게 말라간다.

51~52㎏ 정도로 몸무게를 줄인 김명민은 체중 감량이라기보다 체중 절단에 가깝다.

경이로울 지경으로 삐쩍 곯았다.

그의 전라 연기가 충격적인 이유는 벗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데, 연기 투혼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그의 체중 절단이 오히려 극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인간극장 같은 영화 스토리에 또 다른 의미의 인간극장을 찍어낸 김명민이 만드는 액자구성이라 하겠다.

영화는 ‘시놉시스만 봐도 감이 오는 스토리’를 어떻게 채울 것이냐를 고민한다.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가 결국 죽을 것이라는 마음가짐 정도는 하고 온다.

루게릭병에 걸린 남자와 그의 곁을 지키는 장례지도사 여자라는 인물소개가 곧 영화 스토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새로울 것도 없고, 스포일러도 무의미할 이야기를 어떻게 덧입힐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그 해답을 단도직입적으로 찾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장례지도사 지수와 루게릭병 환자 종우가 만나면서 곧바로 사랑이 시작된다.

죽음에 맞선 사랑이라기에는 설득력, 개연성이 부족한 듯도 싶다.

근육이 마비돼 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종우를 끝까지 보살펴야 하는 의무를 지수는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

만남의 설득력이 부족한 대신 영화 스토리는 길어졌다.

루게릭병에 걸린 남자와 그를 보살피는 여자의 이야기가 구구절절 관객들에게 다가간다.

의식은 멀쩡히 살아있건만, 수족을 움직이지 못하는 루게릭 환자의 고통을 관객들이 온전히 알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나중에는 말도 할 수 없게 된 종우는 눈으로 이야기를 대신한다.

익스트림 클로즈업 샷으로 종우의 눈을 수차례 비추는 카메라 앵글은 눈이 이야기하는 대사를 전하고 있다.

단도직입적 방법은 결국 성공한다.

초반부터 슬픈 대사와 노랫말들을 낚싯밥처럼 매달아 놨다.

수십 차례 등장하는 애절한 이야기들에 언젠가 눈물샘은 걸리게 마련이다.

비슷한 증상의 환자들이 같은 고통을 나누고 있는 병실 풍경은 단조로운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희망과 기적을 바라는 보호자들의 간절함에도 슬픔은 묻어나온다.

여기 저기 널린 미끼들을 모두 문 관객들이라면 눈물 콧물 범벅이 되는 영화다.

용케 피했다고 안도하는 순간 엔딩 크레디트 음악 ‘내 사랑 내 곁에’로 기어이 눈물을 빼내고 만다.

미꾸라지처럼 미끼를 피해 다닌 남성 관객들이라면 ‘왜 우나’ 싶을 수도 있다.

★★★ 그런데 기대가 너무 컸다.

중간은 하는데 기대 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