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인권신장 산 증인
한국 민주주의·인권신장 산 증인
  • 장덕중기자
  • 승인 2009.08.1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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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납치 살해 위기-구금-사형선고 등 파란만장
'한국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정치 일생을 마감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민주주의 및 인권신장의 산 증인이었고, 한국의 민주화는 그와 함께 독재와 맞서 전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계속 반독재 정권과 맞서 싸워왔으며,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끊임없는 운동을 전개했다.

1961년 5월 치러진 재선거에서 승리해 민의원으로 금배지를 달게 된 그는 이틀 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으킨 5·16 쿠데타로 인한 국회 해산으로 의원 선서도 하지 못한채 첫 임기를 마쳤다.

5·16 쿠데타는 80년대 군사 독재정권에 맞서 90년대 민주화 시대를 연 '양김 시대(김영삼, 김대중)'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패배해 민주주의 회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1972년 유신을 선포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망명했다.

김 전 대통령은 망명중에도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등을 결성해 언론과 교포사회를 통해 유신반대 민주화운동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돼 살해당할 뻔하고, 국내에 돌아와서는 가택연금 생활을 당하는 등 핍박을 받았지만 민주화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기정권에 이어, 1979년 12·12 군부 쿠데타와 1980년 5월 5·18 광주민주항쟁 무력진압 등 총칼을 앞세워 군과 정보기관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세력에 의해 김영삼 등 야당지도자와 함께 체포, 구금됐다.

더욱이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감형이 돼 미국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미국에서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을 펼치가 귀국했지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가택에 연금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전 대통령은 1985년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하는 등 민주화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이후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면서 대규모 반독재 투쟁 시위가 발생하고, 같은 해 6월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 등으로 6·10항쟁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87년 6월 항쟁은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6월항쟁 이후 사회민주화는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는 것이 국민적 평가다.

물론 6월 항쟁의 결과로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높았지만, 김 전 대통령이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가 야당 후보 단일화 실패로 결과적으로 신군부의 중심축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어부지리로 당선되기도 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해 한국의 민주주의와 남북 관계 개선 등의 일관된 정책을 펴왔다.

그는 또 대통령에 취임하자 자신을 핍박했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군사 지도자들을 용서하고, 사면해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호남, 호남정치와 DJ는 지난 반세기 가까이 하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정치 9단'이라는 작위에 걸맞게 그가 호남정치사에 남긴 족적은 크고도 깊다.

김 전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모태가 광주.전남지역이기도 하지만, 호남정치 또한 DJ를 빼고 얘기할수 없다.

'지팡이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속어가 지역정가에 나돌 정도로 김 전 대통령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김 전 대통령이 호남정치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지난 1954년 목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부터다.

이후 강원도 인제선거까지 내리 3번을 낙선한뒤 1960년 인제 보궐선거에 당선됐지만 5.16군사쿠데타로 국회의원 선서도 하지 못한채 의원직이 박탈됐다.

국회의원 김대중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63년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입성하면서다.

1964년 국회 본회의에서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상정지연을 위해 5시간 45분 동안 의사진행 발언을 해 국회내 최대 연설시간으로 기네스인증서를 받은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민주당 대변인에 이어 1971년 신민당 제7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고 제8대 총선에서는 목포지역 지원유세중 트럭 압살기도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이 명실상부 호남정치의 맹주로 발돋움한 것이다.

이른바 '황색바람'을 일으키며 광주.전남지역 총선을 잇따라 싹쓸이했다.

1987년, 1992년 대선에서 몰표를 몰아준 것도 호남민들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7월 정계은퇴 2년7개월만에 정계복귀를 선언한뒤 97년 12월 '수평적 정권교체', '준비된 대통령'으로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소외받은 땅 호남민의 한을 풀어줄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다.

퇴임 이후에도 광주.전남지역 정치권에서는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나 이제는 DJ 서거로 호남정치에 새로운 정점을 맞게 됐다.

일부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영향력이 컸던만큼, 또 그의 카리스마가 강했던만큼 지역정치 발전을 더디게 하는 폐해도 만만치 않았다는 지적이다.

무엇보다 '3김 정치'라는 제왕적 보스정치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후계자를 양성하는 데에도 후하지 못했다는 평가다.

김 전 대통령이 퇴임한 지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이제는 DJ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됐지만 그를 이을만한 정치적 재목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광주.전남지역 정치인 중에는 다선의원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긴 하지만 이 지역을 대표해 비전을 제시할만한 리더는 없다는 분석이다.

이른바 포스트 DJ를 이끌 정치인이 없다.

지역정치권의 위상이 이처럼 흐른데는 바로 'DJ정치' 이외에 다른데서 이유를 찾을수 없다는 시각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