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초일류 삼성 실현…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꿨다
이건희 회장, 초일류 삼성 실현…마누라·자식 빼고 다 바꿨다
  • 장민제 기자
  • 승인 2020.10.2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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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부터 휴대전화 등 신수종 사업 '반복된 약속과 도전' 연속
2011년 열린 반도체 16라인 가동식.(이미지=삼성전자)
2011년 열린 반도체 16라인 가동식.(이미지=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킨 배경엔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이 있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나섰고,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대응해 조직의 변화를 모색하고 인재를 발굴했다.

그는 회장에 오르기 전인 1974년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 인수를 주도했다. 당시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비판했지만, 이 회장은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습니까?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지요. 제 사재를 보태겠습니다”며 반도체 사업을 강하게 추진했다.

◇1M 반도체 기업서 글로벌 1위 반도체로 ‘우뚝’

삼성은 1986년 7월 1M(메가) D(디)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 산업을 본격적으로 꽃 피웠고, 1992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64M D램을 개발하며 글로벌 1위로 올라섰다.

삼성의 변화는 이 회장 취임 후 더욱 본격화됐다. 그가 취임할 시점 삼성은 실질보다 외형 중시의 관습에 빠져 있었다. 삼성이 만든 제품은 동남아 등 일부 시장에서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을 뿐,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시장에서는 싸구려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일선 경영진의 관심은 지난해에 비해 얼마나 많이 생산하고 판매했는가에 집중됐고, 각 부문은 눈앞의 양적 목표 달성에 급급해 부가가치, 시너지, 장기적 생존전략과 같은 질적 요인들은 소홀했다.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신경영' 선언을 하고 있다.(이미지=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신경영' 선언을 하고 있다.(이미지=삼성전자)

이 회장은 1993년 초 일본 도쿄에서 현지 고문들에게 “일류상품은 디자인만으로는 안 되고 상품기획과 생산기술 등이 일체화돼야 하는데, 삼성은 상품기획이 약하다. 개발을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시장에 물건을 내놓는 타이밍도 놓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를 받았다.

이어 방문한 프랑크푸르트에선 품질고발 사내방송 프로그램 비디오테이프를 받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비디오테이프엔 삼성전자 직원들이 세탁기 조립 라인에서 덮개 규격이 맞지 않자 즉석에서 덮개를 칼로 깎아 내고 조립하는 모습이 담겼다.

이 회장은 사장단 회의와 여러 선진국들을 둘러보며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1993년 6월7일 프랑크프루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꿉시다”라며 ‘신경영’을 선언했다. 신경영은 그간 지속됐던 양 위주 경영의 악순환을 끊고 질 중심으로 양이 조화를 이루는 선순환의 경영구조를 실현하겠다는 게 골자다.

 

신경영의 출발은 불량 추방에서 시작됐다. 이 회장은 당시 “생산 현장에 나사가 굴러다녀도 줍는 사람이 없는 조직이 삼성전자고, 3만명이 만들고 6000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 낭비적인 집단인 무감각한 회사”라고 질타했다.

이 회장은 불량을 뿌리 뽑기 위한 실질적 조치로 ‘라인스톱제’를 도입했다. 이는 생산현장에서 불량 발생 시 생산라인 가동을 중단해 문제점을 파악해 해결한 뒤 재가동하는 방식이다. 이 제도 도입 후 1993년 삼성전자의 전자제품 불량률은 전년도 대비 30~50% 감소했다.

◇신경영 거듭할수록 사업·조직 안정화

질적 성장을 향한 의지는 이 회장이 신경영 선언 이후 새 먹거리로 제시한 휴대전화 사업에서도 나타났다. 2014년경 삼성전자의 무선전화기 제품 불량률은 11.8%에 달했다.

품질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완제품 생산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1995년 1월 소비자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는 특단의 조치를 실시했고, 3월 수거된 휴대전화 15만대(약 150억원)를 화형식으로 전량 폐기처분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에서 수준 미달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라며 “회사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고 질타했다.

1995년 8월 삼성 애니콜은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51.5%의 점유율로 국내 정상에 올라섰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다.

1996년엔 대한민국이 OECD 회원국에 가입한 해로, 삼성도 연평균 17% 성장률을 기록했다. 성장일로에 들어섰지만, 이 회장은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해 “반도체가 조금 팔려서 이익이 난다 하니까 자기가 서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그저 자만에 빠져 있다”며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삼성그룹은 경영 전 분야에 걸쳐 3년 동안 원가와 경비 30%를 절감하겠다는 ‘경비 330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선택과 집중, 사업재구축 등을 진행했다. 삼성은 이 같은 조치로 이듬해 우리나라를 찾아온 IMF 외환위기를 세계 디지털 시장 선점의 기회로 전환시켰다.

2010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 2010에 참관한 이건희 회장.(이미지=삼성전자)
2010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 2010에 참관한 이건희 회장.(이미지=삼성전자)

이 회장은 인재채용과 협력사와의 관계 등에서 변화를 모색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1995년 전 세계가 무한 경쟁으로 가는 열린 시대를 맞아 학력과 성별, 직종에 따른 불합리한 인사차별을 타파하는 열린 인사를 전격 지시했다. 이때부터 삼성은 대졸 공채 대신 3급 신입사원 입사 시험을 실시했다. 또 여성인재에 대한 차별철폐와 함께 국내 기업 중 가장 앞서 어린이집 사업을 현실화 했다.

◇상생의 역사…올림픽 개최로 꽃피워

이 회장 취임 이듬해인 1988년엔 중소기업과 공존공생을 선언하기도 했다. 자체 생산하던 제품과 부품 중 중소기업으로 생산이전이 가능한 352개 품목을 선정해 단계적으로 중소기업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이 회장은 “삼성그룹의 대부분이 양산조립을 하고 있다”며 “협력업체를 키우지 않으면 모체가 살아남지 못한다”고 강조했고, 1996년도 신년사에선 “협력업체는 우리와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신경영의 동반자”라고 말했다.

1987년 열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취임식.(이미지=삼성전자)
1987년 열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취임식.(이미지=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은 IOC 위원으로서 스포츠를 국제교류와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촉매제로 인식, 스포츠 외교활동도 꾸준히 펼쳤다. 2009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적극 나선 이건희 회장은 1년 반 동안 170일간 해외 출장을 다니며 IOC 위원들을 만났다.

이 기간 이건희 회장이 평창 유치를 위해 지구 5바퀴가 넘는 거리를 전 세계로 누볐다. 이 같은 노력 끝에 2011년 7월 열린 IOC 총회에선 ’2018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평창이 선정됐다.

다만 이건희 회장의 경영 이면엔 어두운 면도 존재한다. 그는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문제인 정경유착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삼성이 창업 초기부터 고수한 무노조·비노조 경영원칙은 시민·노동계에서 끊임없는 반발을 샀다.

이 회장은 1996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의 불법 정치자금 사건에 연루됐다.

2007년엔 삼성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가 ‘차명계좌를 통한 비자금조성 의혹’을 폭로, 수사결과 사실로 드러나며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또 아들 이재용 부회장에 편법으로 경영권을 승계한 점도 꼬리표로 달고 있다.
 

jangstag@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