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감정평가업 소송전으로 본 '혁신과 규제'
[기자수첩] 감정평가업 소송전으로 본 '혁신과 규제'
  • 천동환 기자
  • 승인 2020.09.15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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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300㎞로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자동차와 운전 기술을 가진 사람은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 최고 시속 몇 ㎞까지 자동차를 운행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간혹 기술의 발달이 생활의 모든 것을 바꿔 줄 것으로 믿는다. 그러면서 새로운 기술에 '혁신'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기술 자체가 기존 틀을 완전히 바꿔 새로운 무언가를 가져다주길 바란다.

반대로 이런 새로운 기술이 실생활에 적용되는 것을 가로막는 기존 제도에는 '규제'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사회에서 질서 유지자로서 역할하고, 최소한의 안전망으로 작용해 온 법과 제도를 너무나 쉽게 낡은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러는 사이 언제인가부터 우리 머릿속에는 '혁신'은 좋고, '규제'는 나쁘다는 인식이 똬리를 틀었다. 

제도를 만들고 운용하는 정부조차 명확한 기준 없이 인식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인다. 오죽하면 "혁신만 가져다 붙이면 다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런 막연한 인식은 여러 산업 분야에서 신구(新舊) 간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 된다. 혁신이라는 통행권을 가진 스타트업은 구렁이 담 넘듯 법의 경계를 침범하고, 정부는 이를 용인한다. 기존 법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던 주체들은 "이게 웬일인가?" 하며 반발한다.

이런 갈등상황에서 여론은 대체로 기존 주체들에게 불리하게 형성된다. "혁신의 발목을 잡는다"거나 "법이 기술을 못 따라간다"거나 하는 말로 기존 질서에서 움직이던 것들을 고루한 것으로 평가한다.

최근 부동산 감정평가업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었다. 빅데이터를 활용해 빌라·연립주택 시세정보를 제공하던 한 스타트업은 금융기관을 상대로 부동산 감정평가와 유사한 서비스를 하고 있다. 감정평가사협회는 이 회사가 감정평가법인이 아님에도 감정평가 업무를 한다며 감정평가사법 위반을 주장했지만, 금융위원회는 이 회사의 사업을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했다. 결국 이 문제는 소송전으로 번진 상태다.

이를 두고 몇몇 언론은 기득권 세력인 감정평가업계가 새로운 기술의 발전과 스타트업의 성장을 막는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기자의 생각은 다르다. 아직 위법 여부에 대한 판결이 난 것은 아니지만, 위법성이 의심되는 행위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법이 자꾸만 혁신이라는 이름에 밀려나면 질서가 무너진다.

법 자체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부분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법을 현실에 맞게 바꿔야 한다. 기존 법은 그대로 놔두고 혁신과 성장만 강조하면 우리 산업은 거대한 싸움판이 될 뿐이다.

아무리 혁신적인 자동차가 나와도 현행법상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는 시속 110㎞를 넘어 달릴 수 없다. 이 원칙이 무너지면 고속도로는 난장판이 될 게 뻔하다.

cdh4508@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