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아갈 때와 물러설 줄 아는 東天 대감
[칼럼] 나아갈 때와 물러설 줄 아는 東天 대감
  • 신아일보
  • 승인 2020.04.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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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스님 자장암 감원・용인대 객원교수
 

창궐하는 전염병 코로나19로 대구 경북권이 큰 혼란에 빠져 나라의 경제와 서민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지고 특히 불가(佛家)는 법회와 포교일정까지 끊인지 꽤 여러날이다.

더구나 대구 경북권에 머물고 있으니 누군가를 만나고, 일을 본다는 것이 여간 께름칙해 작은 골방에서 스스로 자가 격리 중이었던 수일전, 추적 거리며 봄비 내리는 산골 암자의 운무와 풍광은 거의 동양화의 한폭처럼 근사하기 이를 때 없던 저녁 무렵 갑자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경상도 '해뜨고 해맞는 고장 연일' 산골의 대단한 수재로 약방의 허드레 심부름 사환일과 입주 가정 교사를 하며 고난의 행군으로 서울 사대문안의 명문대를 마치고 행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고위 공직을 전전하고 장관까지 지내다 금뺏지 까지 거머쥔 입지전적인 분께서 지나는 길에 잠시 전해줄 것이 있다며 방문 하겠다는 전갈이었다.

일기도 고르지 않은 날 구비구비 운제산 자락의 암자에 급작스럽게 전직고관이며 현직 국회의원이 방문 하겠다니, 순간 하필 이런 시기에 오시나 하는 염려도 없지 않았으나, 예전 같으면 당상관인 이조판서(제9대 행정자치부 장관)를 지내고 대제학(대학총장)까지 역임한, 일흔을 넘긴 현역 국회의원이 지나는 길에 들르시겠다니, 마다하는 것도 크게 예의에 어긋나는 듯 하고 또한 그다지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각설하고 필자에게는 인생항로에 있어서 대단히 영향을 끼치고 매료된 책이 두 권이 있으니 김성동의 '만다라'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었다.

이 두권의 주제는 종교적 방황과 참된 신앙의 문제에 대한 주제인데, 지금도 몇구절은 필자의 뇌리에 아직도 생생하다.

만다라의 저자 김성동 선생은 양평의 산방에서 장시간 서예에 대한 주제로 담소를 나누고 몇차례인가 전화도 주고받은 기억이 있다.

장관께서 친히 증정 서명까지 해 주신 두권의 자서전적 도서에서 대문호(大文豪)인 이문열의 행적을 잠시 엿 볼 수 있어 하얗게 밤을 지새워 탐독했다. 이문열 선생은 언제인가 일생에 기회가 주어 진다면 꼭 한번 만나고 싶었던 차에 주옥같은 저서에서 짧게나마 마주할 수 있었으며 그분과 교분이 남다름을 알 수도 있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더불어 살아야 하며 항상 관계 맺음속에서 살지만 포항이라는 낯설었던 도시에서 거장과의 '고담준론' 아니 그분의 '인생강의'는 어느 명강사의 명강의 보다도 나를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그 해박하고 거침없는 지식과 풍부한 인생 경륜에서 우러 나오는 끊임 없는 동서양의 고전과 진리를 설파 하는데, 필자도 나름 책 좀 보았다고 자부하지만 압도당해 경탄하기에 이르렀다.

어느때는 차관급인 중앙 공무원 교육원 원장직을 수행하시며 햇병아리 공직자들에게 공직에 임하는 목민관의 바른 자세를 두루 일러 준 국보급 달변가로 공직 기강에 귀감이기도 하셨다.

세상의 연배는 익히 한세대 윗분이지만, 겸양과 인품과 학식뿐 아니라 40대 기수로 까마득히 한참이나 어린 고향의 보좌관 출신 아들 뻘 되는 후배에게 영감(국회의원)의 길을 양보한 통큰 결단이며 여러 정황으로 이미 대인의 기질과 어쩌면 초탈한 경지에 저절로 탄복해 마지 않을 수 없다.

행정고시 수석의 천재로 약관의 나이에 이른 관리가 됐지만, 늘 문학을 품고 살았다는 대목은 더욱 절정이다.

법전(法典)과 행정서류에 파묻힌 건조한 공직사회에서 조차 문학적 감수성을 잃지 않았다니, 이문열이 자타공인 대한민국 문학사에 한획을 그은 인물이라면 한 때 장관을 지낸 동천 박명재 의원은 포은 선생과 더불어 '해뜨고 해 맞는 고장 연일'이 낳은 명실공히 거인이고 거장이 아닐 수 없다.

충청도 산골 출신 촌놈인 필자의 12대 중시조이시고 경북 풍기 산촌에서 한 세월을 사시다 72세 되던해 마치신 추월당 한산두 할아버지는 충절과 학행으로 향불천위로 노계서원에 배향 되시었는데, 추증 벼슬도 관직도 없었던 이유가 경상도 남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경상도 남인은 조선사에서 거의 200년쯤 벼슬길에서는 거리가 멀었다.

비록 비루하고 하찮은 벼슬길에 목메지 않고 의병을 일으킨 백패(白牌)의 유학일지라도 고고한 절개를 잃지않고 학문과 진리를 연마하며 한생을 다한 사족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갖고 사는 필자는 선인들의 갈장(묘갈명, 행장)을 읽으며 요즘 세월을 낚고 있지만, 혹여 지금보다 더 탁월한 문장을 갈고닦아 훗날에 오늘보다 더큰 거장이 되시어 영남, 아니 이나라의 거물, 어쩌면 인류사의 큰 인물, 동천께서 세상을 마치실때 쯤 그이의 행장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면 못 이룰 꿈은 아니지 않는가, 문정공 한계희 할아버지의 묘갈을 써준 달구벌의 거장 서 거정 선생께서 문정공 어른의 비문에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한 계희였다"라고 했듯, 나를 알아준 박명재 의원은 익히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 자리에 앉고도 남을 큰 그릇으로 넘치고도 남음이 있음이다.

스스로 나아갈 때와 물러설 줄도 아는 '영일만의 대감어른'이며 먼 훗날에도 굳건하게 노익장을 과시하시며 웅지의 나래를 지금보다 훨씬 더 장엄하게 펼치시길 고대하며 산중의 깊은밤에 졸문을 줄인다.

/탄탄스님 자장암 감원・용인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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