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서 열린 2심…‘아내 살해 치매노인’ 집유로 감경
병원서 열린 2심…‘아내 살해 치매노인’ 집유로 감경
  • 이상명 기자
  • 승인 2020.02.10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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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적 사법’ 징역형 집유…주거 제한·보호관찰 명령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초고령화로 접어든 한국 사회에서 관련 대책은 미비한 가운데 2018년 질환을 가진 노인이 배우자를 살해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해 재판에 넘겨졌다. 

1심에서는 징역 5년이 선고됐지만 피고인이 입원한 병원을 찾아간 2심 법원은 원심을 깨고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10일 오전 정준영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서울고법 형사1부는 피곤인 A씨가 입원해 있는 고양시 일산연세서울병원을 찾아가 A씨의 살인 혐의 항소심 사건 선고 공판에서 징역 5년을 선고한 1심을 깨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통상 형사재판은 피고인이 법정에 출석해 열리지만 이례적으로 이날 재판은 재판부가 피고인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찾아가 진행됐다. 

치매 환자인 A씨는 2018년 12월 아내 B씨를 마구 폭행하고 흉기로 찔러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 재판부는 “정신 질환에 대한 집중적인 치료가 필요하고 질병으로 장기간 수감생활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점 등을 고려했다”며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A씨는 구치소에 수감 중 자신을 면회 온 딸에게 “(사망한) 아내와 왜 동행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등 치매 증상이 심해져갔다. 

그러자 항소심 재판부는 지난해 9월, A씨의 주거를 치매를 치료하는 병원으로 제한하고 치료목적의 보석 결정을 내렸다. 이는 ‘치료적 사법’을 구현하기 위한 것으로 치매 환자에게 내려진 첫 보석 결정으로 주목을 받았다. 

‘치료적 사법’은 재판부가 개별 사건의 유·무죄를 가리고 처벌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치유적 역할’도 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항소심 재판부는 공판 절차에 있어서는 법정 재판과 다르지 않지만 판결 선고 장소를 A씨가 입원 중인 병원 한켠의 작은 사무실로 선택했다. 

병원 직원이 끄는 휄체어를 타고 마스크를 착용한 채 선고 장소로 들어 온 A씨는 재판 중 고개를 떨군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킨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개인적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사건이지만 검사로서 국가기능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말씀드릴 수밖에 없다”며 A씨에게 원심과 같은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A씨의 자녀는 재판에서 “아버지가 병원에 있으면서도 병원이라고 인식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가장 안타깝다. 증상이 악화하는 부분은 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계속 치료하며 모시겠다”고 밝혔다.

A씨도 최후진술이 주어졌지만 A씨는 치매를 앓고 있는 상황으로 제대로 된 진술을 하지 못했다.

검찰에 이어 변호인의 의견을 참고한 재판부는 A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받은 1심보다 감경된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다만 5년의 집행유예 기간 보호관찰을 받아야 하고 구치소가 아닌 치매 치료를 위한 병원으로 주거지 제한해 계속 치료받을 것을 명령했다.

재판부는 “치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피고인에게 교정시설(구치소)에서 징역형을 집행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해 정당하다는 평가를 받기 어렵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징역형의)실형을 선고하는 것보다 치료 명령과 보호관찰을 붙인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해 피고인이 계속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모든 국민이 인간의 존엄성을 가진다고 선언한 헌법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변호인은 이날 재판부의 징역형의 집행유예 선고가 내려지자 “법원과 검찰 및 피고인의 가족 그리고 치료병원의 적극적 협조와 노력이 있어서 가능했던 전향적인 판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변호인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 치료법원과 같은 제도가 정비돼 활성화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 A씨와 자녀에게 “오늘 모든 사법절차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피고인 치료를 위한 ‘치료적 사법절차’는 계속됨을 명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법원이 법정 벗어나 판결을 선고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4년 서울중앙지법은 하반신 마비 등의 사유로 법정 출석이 곤란한 피고인을 위해 재판부가 직접 피고인이 거주하는 곳으로 찾아가 형을 선고했다.

daisylee19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