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 칼럼] 역사를 통해 본 한일관계
[신아 칼럼] 역사를 통해 본 한일관계
  • 신아일보
  • 승인 2020.01.2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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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 대구경북총괄본부장
 

1380년 8월(고려 우왕 6년)왜구의 병선 500척이 진포(지금의 군산 앞바다)를 침입했을 때 최무선 장군이 병선 100척과 화포 등으로 이를 물리친(진포대첩)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일본은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 본토 공략 거점으로 삼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당시 일본 군사력을 과소평가했던 선조 임금은 도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몽진하면서 전 국토가 초토화된 바 있다.

19세기말 한반도는 또 다시 위기에 직면한다. 일본을 견제하고자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뒤이어 러시아와도 조약을 체결했다.

여러 열강들과 통상조약체결은 조선의 운명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을 탄압하기위해 일본 군대를 파견해 왔고 명성왕후의 외교력이 주도된 가운데 1895년 10월8일 일본공사 마우라고토는 사무라이들을 앞세워 밤중에 명성왕후를 시해했다. 이어 항거하는 의병을 체포 학살했다. 

1902년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어 중국의 이권을 영국에 양보하고 조선에 대한 이권을 인정받는다.

영일동맹에 자극을 받은 러시아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때 러시아와 전쟁을 피하고 싶었던 일본은 38도를 기준으로 조선을 절반씩 양보하자는 제의를 하게되자 러시아의 거부로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일본이 승리한다. 

이어 일본은 1905년 미국과 일명 카츠라태프트조약을 비밀리 맺고 당시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와 일본외상 카츠라가 양국을 대표로해 맺은 이 조약으로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한반도를 차지하는 것에 합의했다.

그리고 같은해 미국뉴헴프셔주에서 열린‘포츠머스회담'에서 미국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우월적인권리를 인정해주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이어 1910년 강제로 조선을 병합시켰다. 이에 반대하는 '헤이그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일제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일제는 1930년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을 도발 우리민족을 침략전쟁에 내몰았고 부녀자를 정신대에 끌어내는 등 막대한 희생을 강요했다.

1945년 8월15일은 우리민족의 줄기찬 독립투쟁으로 광복을 맞을 때까지 36년간 우리민족의 문화말살을 시도했고 이에 항거하는 애국지사들을 학살과 고문 등으로 탄압해 세계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반도가 두 쪽으로 갈라진 2차 대전의 말미에 소련의 남진을 막기위해 미국이 취한 38도선의 요구라고 지적하고 있으나 한반도 분단을 처음 추진한 것은 미국이 아닌 일본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주변 열강들이 우리영토를 놓고 마음대로 선을 그어도 우리는 그 사실조차 모른채 국토 분단의 희생을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우리민족의 와신상담(臥薪嘗膽)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2018년 우리나라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피해자 배상책임 인정 판결로 일본 정부가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규제 발표로 한일 관계가 역대 최악의 위기다.

2차 대전 전범 국가 독일은 과거사를 반성하고 1970년 당시 독일 총리인 빌라부란트가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굻고 사죄하는 모습은 전 세계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바 있다. 그러나 같은 전범국인 일본 정부는 한국과 관계를 악화일로 태세로 유지하면서 뉘우침이나 사과의 뜻은 망각한 상태이다.

미래 시장을 놓고 한국·중국·일본이 숨 가쁜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으로, 조속한 한일국교 정상화가 필요한 시기라는 것은 양국이 공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뉘우침이나 반성을 망각한다면 지구상에서 영원히 버림받는 민족으로 남을 뿐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장병욱 대구경북총괄본부장

master@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