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에 개봉해 천만명 이상이 관람한 영화 ‘변호인’은 1981년 9월 공안 당국이 부산 지역 양서협동조합에서 사회과학 독서 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이 영화속에서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가 불법적인 수사를 받고 기소돼 재판을 받는 진우(임시완 분)의 변호를 맡으면서 “헌법 제26조 4항(제5공화국 헌법기준, 현행 제27조 제4항), 무죄추정 원칙에 따라 법리적인 판단은 오로지 이 재판에서 제시하는 증거 위에서만 해야 됩니다. 재판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피고인을 죄인 취급하는 그 어떤 법정 관행도 본 변호인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공권력에 부당한 사유. 그걸 가리는게 이번 재판의 핵심아닙니까”라고 열정적으로 변론하는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죄추정의 원칙이 왜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가치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1798년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제정된 ‘인권선언 제9조’에서 확립됐는데, 이 원칙을 도입한 근본적인 이유는 마녀재판과 같은 인간의 집단광기에 의한 비이성적 판단을 제어하기 위함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형사재판은 흔히 말하는 원님재판처럼 수사권·기소권·재판권이 분리되지 않은 규문주의 형태였다. 규문주의 형사재판에서 유죄를 입증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자백’이었고, ‘증거의 왕’ 자백을 얻기 위해 고문이 흔하게 사용됐다. 규문주의의 산물인 마녀재판은 인간이 전지전능하지 않은 존재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고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언제든지 집단광기에 의한 비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범죄가 중하다해 사실을 밝히기 위해 고문하는 것을 금지하고, 증거가 명백한 범죄자가 있더라도 변호인 선임권, 진술거부권 등을 보장해 주며, 수사기관은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만 증거를 찾고 이렇게 찾아진 증거에 의해서만 법원은 판결을 하도록 하는 무죄추정 원칙이 확립 된 것이다.
최근 자신의 전 남편을 살해하고 사체를 손괴, 유기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고유정의 1심 재판이 시작돼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일반 대중이 알고 있는 이 사건에 관한 정보는 제한 된 수사정보 및 언론에 의한 보도일 뿐인데도 이미 대중들은 고유정이 계획적으로 전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것이라 믿고 있을 뿐 아니라, 고유정은 변호인 없이 당연히 법정 최고형을 선고받아야 하기 때문에 헌법이 보장하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마저 박탈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대중들은 무죄추정의 원칙 때문에 진범임을 알면서도 처벌하지 못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무죄추정의 원칙이 지켜지면 범죄자라고 의심받는 자라 하더라도 조사를 통해 억울함을 풀 가능성이 높지만, 무죄추정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울한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범죄자로 지목된 사람은 자신이 무죄임을 증명해야 하는데, 무죄란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증명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사회가 과연 유지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죄를 범한 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보다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는 죄악이나 범행이 너무도 많아서, 그 모두를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을 법정에 세워 유죄 선고를 하고 그를 사형에 처하기라도 한다면 시민들은 말할 것입니다. ‘내가 죄를 범하든 말든 상관없어’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해서 보호받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이런 생각이 시민의 의식 속에 자리를 잡는다면 그 어떠한 안전도 다 끝일 것입니다”라고 말한 존 애담스의 말은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선량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파렴치한 범죄자라고 지목된 자에게도 당연히 적용돼야 한다.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기 때문에 오판의 가능성이 있음으로 판단의 마지막까지 사건을 원점에서 바라보아 억울한 사정이 없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죄가 있다면 그 죄에 맞는 합당한 처벌을 당연히 받아야 한다. 다만 그 죄가 인정돼 처벌을 받는 이유는 대중의 분노와 심증이 아니라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인정하는 모든 권리를 행사했음에도 증거상 합리적으로 의심이 없기 때문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