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는 인간의 언어를 기록하기 위한 시각적 기호 체계이다. 사람의 생각과 말은 문자를 통해서 기록돼 시간과 공간을 극복한다. 문자는 기록에 그치지 않고 그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까지 지배한다.
한글은 유일하게 만든 사람과 글자를 만든 원리가 알려진 세계적으로 가장 과학적인 우리나라의 문자이다.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은 여러 가지 한글 창제설 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영화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일본 승려들은 세종대왕에게 선대왕이 약속했다며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달라고 요구한다. 과연 세종대왕은 일본 승려들의 요구대로 팔만대장경을 일본 승려들에게 주어야 하는 것일까?
먼저, 선대왕이 한 약속은 자식인 세종대왕이 이행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선대왕의 모든 권리와 의무는 상속인인 세종대왕이 포괄적으로 승계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속인이 상속을 포기하면 피상속인인 부모의 권리와 의무를 승계하지 않는다.
상속포기는 상속인의 지위를 포기하는 것으로서 특정 재산만 승인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다. 상속포기 신고는 상속개시가 있음을 안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가정법원에 해야 한다. 상속을 포기하면 이를 취소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선대왕이 일본 승려들에게 팔만대장경을 주겠다는 약속은 법률적으로 증여로 볼 수 있다. 증여란 당사자 일방이 무상으로 재산을 상대방에게 수여하는 의사표시를 하고 상대방이 이를 승낙하면 성립하는 계약이다.
채무를 면제받거나 시가보다 현저하게 저렴한 대가를 치르고 재산을 취득하는 경우도 시가와 대가의 차액은 증여로 볼 수 있다. 일본 승려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선대왕이 일본 승려들에게 팔만대장경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한 것으로 보이므로 증여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증여도 증여의 의사가 서면으로 표시되지 않은 경우에는 각 당사자는 이를 해제할 수 있다. 선대왕이 일본 승려들에게 팔만대장경을 주겠다는 의사도 서면으로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대왕이 해제할 수 있다. 선대왕의 권리와 의무를 포괄 승계한 세종대왕도 이를 해제할 수 있다.
서면으로 표시되지 아니한 증여를 해제하더라도 이미 이행한 부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즉, 서면으로 표시되지 않은 증여는 해제할 수 있지만 이미 그 증여를 이행했으면 해제하더라도 돌려받을 수 없다.
부모의 재산을 증여받은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지 않아서 부모가 증여를 해제하더라도 다시 돌려받을 수 없다. 이는 이미 이행돼 재산이 자식에게 소유권이 넘어갔을 뿐만 아니라 소유권을 이전하면서 증여의 의사가 계약서 등을 통해서 서면으로 표시됐기 때문이다.
선대왕이 일본 승려들에게 팔만대장경을 증여하겠다고 하는 것이 조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약은 국제법률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 체결한 국제법 주체 상호간의 문서에 의한 합의를 말하는데, 일본 승려들은 국제법의 주체가 아니다.
여러 가지 한글 창제설이 있지만 세종대왕께서 한글 창제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자와 지식을 독점한 양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백성들을 위해서 가장 과학적인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께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