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독립선언과 김 마리아 선생
2.8독립선언과 김 마리아 선생
  • 전외숙
  • 승인 2009.02.0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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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2.8독립선언! 그것도 대한민국의 땅이 아닌 적진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 90년 세월을 훌쩍 달려왔다.

1919년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재일 한인유학생들은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영향을 받아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각국 대사관, 공사관 및 일본정부와 국회에 발송하고 2월 8일 유학생 수백명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실행위원을 포함한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었다.

2.8독립선언서는 3.1독립선언서 보다 훨씬 강경하다.

일제의 침략을 고발하고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8독립선언은 1920년대 항일투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국내외에 수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바야흐로 국내에서는 애국계몽운동이 해외에서는 항일무장운동이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외교활동을 통한 국제여론에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여러 형태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도쿄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가 체포 구금되었던 김마리아(金瑪利亞) 선생은 귀국해서 항일여성단체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석방 뒤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에도 참여해 임정을 독립운동의 중심체로 해야 한다는 소위 ‘개조파’로 활약하기도 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김마리아 같은 여성동지가 열 명만 있었던들 대한은 독립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김마리아 선생은 1944년 3월 고문 후유증으로 광복 17개월을 앞둔 51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진정 필요한 것은 민족 단결과 실력 양성이다’며 확고한 의지와 가치관을 품고 그 뜻을 펼쳤다.

가족과 함께 보라매공원을 찾아 김마리아 선생의 동상을 바라보며 희망찬 새해 설계를 해 보자. 경제가 어려운 이 때, 애국선열들의 위국헌신 정신을 되살려 국민 역량을 결집시켜 나간다면 우리는 어떠한 난관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국가보훈은 국민 대통합과 역동적인 국민 에너지를 창출해 내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