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6.25 참전군인 이셨다.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자 가난한 살림에 입 하나 줄이려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 자원해서 입대를 하셨고, 입대하던 해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이 나자 장교 자원이 부족한 터라, 단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이유로 전투 현장에서 현지 임관이라는 형식으로 장교가 되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임관 구분은 갑종 57기이다.
당시 아버지의 소속부대는 백골부대라 불리우고 있는 육군 3사단이었는데, 3사단은 제일먼저 38선을 돌파해 북진한 부대이다. 원산근처까지 진격한 아버지는 그만 전투 도중 포로가 되셨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포로 이송 중 과감하게 탈출했는데, 탈출 과정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어 더 이상 보병장교로 근무할 수가 없어 결국 부관병과로 전과를 하셨다.
그러던 아버지는 가끔씩 다리가 저려오는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군인연금 대상자인 20년 복무에서 1년 1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전역하셨다. 전역한 아버지는 간장공장을 운영하다가 화재로 인해 모아놓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자, 재향군인회에 취업도 해보고, 이러저러한 사업에도 손을 대셨지만 생활형편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군인연금법이 수차례 개정되는 과정에서 전쟁에 참전한 군인은 참전 기간을 복무기간의 2배수 3배수로 산정한다는 입법이 이루어졌다. 이 법을 적용받게 되면 아버지는 참전기간만 2년이 넘기 때문에 복무기간이 20년을 넘게 돼 군인연금 대상자가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법에 적용되는 대상은 현재 복무중인 현역으로 한정한다는 것이다. 기 전역자를 제외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예산부족이었다. 그러면서 언젠가 예산이 확보될 경우에는 전역자도 소급해서 포함시키겠다는 약속도 덧붙였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약 1000여명이 모임을 결성해 국방부를 방문하고, 국회를 찾아가 읍소를 해도 무관심과 예산타령에 힘없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대상 인원이 1000여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소요되는 예산도 많아봐야 수십억원에 불과하지만 국방부는 그저 예산타령 뿐이었다.
이에 실망한 대상자들은 하나 둘 씩 모임을 탈퇴하거나, 고령으로 인해 고인이 되는 숫자는 늘어만 갔다. 이제 몇 분이나 생존해 계실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언젠가 정권이 바뀌면 아버지같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애쓴 참전용사들의 입장을 헤아려주는 정부가 들어설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군인연금법이 개정된지 40년이 다 되도록 지금까지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TV에서는 연일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보상 문제가 나오고, 몇 해 전에는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얼마가 지급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아버지는 참전 군인들에게도 정당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계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존심 강한 아버지는 13평짜리 임대주택에서 노령연금과 쥐꼬리만한 6.25참전수당으로 생활하시면서도 결코 자식에게 손을 벌리기는커녕 자식이 주는 용돈도 마다하셨다. 그저 국가가 법에 정한 정당한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 하셨다.
그러던 아버지께서 작년 겨울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마지막 가시는 모습에 아버지는 눈물을 보이셨다. 그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버지만 아시겠지만, 다시는 나라를 위해 희생하지 않겠다는 회한의 눈물이 아니기를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