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본인이 시(市) 감사위원회에 재직하던 때였다. 본인의 주 임무는 관 발주 건설공사의 하도급 관계에 이뤄지는 불공정행위를 찾아 적발하고 바로잡는 것이었다.
감사 현장에 나가 불공정행위 확인을 위해 현장에서 사용하는 모든 계약서를 점검했던 적이 있다. 특히, 근로계약과 관련해 우리의 현실이 그러하듯 계약서 자체를 제출하지 못하는 회사들이 상당수 있었고, 심지어 현장에 투입된 인력명단 자체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회사도 종종 존재했다. 불공정 계약을 논하기에 앞서 계약서 자체가 작성되지 않아 불공정 자체를 논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현실이었던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아직도 법으로 금지하는 무등록건설업자에 대한 품 떼기 계약(오야지라 불리는 무등록건설업자가 일정 작업을 도급받아 시공하고 대가를 받아가는 계약으로 현행법상 금지되는 계약)이 버젓이 이뤄지고 있고, 그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현장들. 이곳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매몰사고 인원 현황파악의 미비, 임금 등 대금체불 부조리는 위 상황의 필연적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현장 관계자 면담 과정에서 간혹 어떤 이는 현장별로 필요에 따라 채용이 이뤄지는 현장의 특성과 불필요한 과정을 생략하려는 경향에서 그 원인을 찾고,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그러나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종사자들에게 근로계약서의 의미는 내가 당해 현장에서 일했다는 사실, 그 현장에서 일하다가 다쳤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유력한 그리고 유일한 증거자료일 수 있다. 그렇기에 그 부분은 양보할 수 없는 영역이다.
물론, ‘근로기준법’이나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등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한 많은 법령들이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행위 자체에 대해 제재규정을 두고 있고, 실제로 이에 대한 진정·고소 등이 이뤄질 경우 처벌이 되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를 지키려는 현장의 노력은 부족하다. 사고 등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그저 번거로운 절차에 불과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회사와 회사의 관계, 즉 원·하도급 관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계약서가 작성은 돼 있기는 하지만 계약조건에 대해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회사 관계자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 원·하청이 적지 않은 기간 다수의 현장을 같이 운영하며 계약관계를 유지해 온 탓도 있거니와 표면적으로는 ‘상호신뢰’를 내세우며 상대방이 시킨 만큼 당연히 챙겨주리라는 관행에 대한 믿음이 강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결정적 순간에는 위와 같은 믿음은 신뢰가 지속해 온 기간이 무색하게 순간적으로 깨진다. 서로를 신뢰한다는 미명 아래 많은 부분이 생략될수록 신뢰의 틈은 더 벌어지기 때문이다.
비단 건설 현장을 예로 들었으나 위와 같은 인식은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괘씸죄’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예의’라는 이름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권력자에게 어떤 번거로운 행동을 요구하는 것을 금기시 해왔다. 갑을관계에서 을이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하는 행동도 마찬가지다. 을이 계약서 작성을 요구하는 것을 갑은 자신에 대한 불신과 도전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듯이 계약서 교부는 을의 당연한 권리이자 동시에 향후 법적 분쟁을 줄이는 최고의 수단이다. 관념이 바뀌고 문화가 정착돼야 갑을관계의 개선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