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구의회 건설재정위, 항일유적지 방문
강동구의회 건설재정위, 항일유적지 방문
  • 김두평 기자
  • 승인 2019.05.24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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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윤동주생가·청산리대첩 유적지 등 관람
(사진=성동구의회)
(사진=성동구의회)

서울 강동구의회 건설재정위원회가 김남현 위원장을 비롯한 위원들(황주영 의원, 신무연 의원, 이원국 의원, 양평호 의원, 조동탁 의원)들과 제갑섭 부의장, 진선미 의원, 방민수 의원이 지난 9일부터 5박6일 간 중국항일유적지 탐방 연수에 나섰다고 24일 말했다.

구의회는 3일차에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방문했다.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은 높이 2750m로 현재 2/3은 북한, 1/3은 중국 영토에 속해있다.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자리 잡고 있는 중국 동부 최고의 산맥을 찾은 구의회 건설재정위원들은 그 웅장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백두산의 웅장함을 눈으로 직접 본 양평호 의원은 "백두산이 이데올로기의 대상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과거 조선 문인들이 다양한 작품을 통해 한민족의 기원을 백두산으로 인식하는 조선의 정체성을 투영한 바 있고 한민족의 영산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며 "백두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장엄한 경치, 여러 봉우리들이 백두산을 기점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리 민족의 기상을 느낄 수 있고 마치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성이 있는 것 같다"고 감회를 말했다. 

백두산 탐방을 마친 의원들은 일제히 "백두산은 한민족의 조종산으로서 한민족 누구나 보고 듣기만 해도 설레는 '민족의 명산'임에 틀림없고 한민족의 영혼이 서린 곳"이라며 "오롯이 한민족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백두산에서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새해의 일출을 맞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고 입을 모았다.

구의회 위원들이 4일 차에 방문한 곳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명동촌에 위치한 윤동주 생가였다. 윤동주 생가는 1900년 조부 윤하현이 지은 남향의 기와집으로 윤동주 가족이 이사 간 후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가 1981년에 허물어졌고 1994년 8월 연변대학 조선연구센터의 주선으로 복원됐다. 

윤동주가 유년기에 공부한 방, 방학 때 귀향해 시를 쓰던 방이 당시 그대로 만들어져 있었다. 주변에는 외숙인 김약연이 세운 명동교회, 윤동주기념비, 윤동주가 1939년 9월에 쓴 시 '자화상'에 나온 우물, 명동학교 유적 등이 있었다.

윤동주 생가를 둘러본 김 위원장을 비롯한 위원들은 "시를 무기로 삼은 반일저항시인 윤동주의 출생과 성장기를 엿보고, 문학적 재질을 꽃피운 시절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며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항의표시를 하는 등 그의 애국심과 문학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주옥같은 반일저항시를 발표하고 1944년 징역을 살다 광복을 앞두고 옥사한 그의 나이가 29세라는 사실과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자기성찰, 자아반성, 희생적 의지를 표출한 '서시, 별헤는 밤' 등 그의 대표적 작품을 떠올리니 마음이 경건해진다"고 소회를 밝혔다.

다음으로 위원들은 한국독립군들이 일본군을 대파했던 청산리대첩 유적지를 방문했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사이에 청산리 일대에서 홍범도의 연합부대와 서일총재의 북로군정서군이 연합해 백운평 전투를 비롯 10여 차례 일본군과 싸운 전투다. 

구의회 의원들은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의 건립 취지문과 건립 경위를 밝힌 글을 읽으며 "한국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대첩으로 독립전사에 기록될 만하다"며 선조들의 충혼을 기리기도 했다. 

[신아일보] 서울/김두평 기자

dpkim@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