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풍년의 역설, 손 놓고 있는 정부
반복되는 풍년의 역설, 손 놓고 있는 정부
  • 박성은 기자
  • 승인 2019.05.22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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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TV에서 “올해 쌀농사는 대풍년이다”, “양파 작황이 좋아 풍작이 예상된다” 등의 멘트와 함께 산지 농가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들어 올리며 활짝 웃는 모습을 자주 봤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풍년·풍작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농가의 함박웃음과 오버랩 돼 ‘좋은 소식’으로만 받아들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새인가부터 풍년, 풍작이라는 얘기가 들리면 걱정부터 앞선다. 작황이 좋아 생산량이 늘수록 열심히 땀 흘려 키운 농산물이 제 값은커녕, 생산원가에도 미치지 못해 결과적으로 키울수록 빚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농가들이 눈물을 머금고 밭을 갈아엎으며 산지를 폐기하는 뉴스가 전국 곳곳에서 들려온다. ‘풍년의 역설’인 셈이다.

이러한 풍년의 역설이 잦아지고 있다. 지난겨울부터 배추와 무, 대파, 양파, 마늘 등 노지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채소가격이 평년보다 절반 이상 폭락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이 지배적이다. 농산물은 다른 상품과 달리 기후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가격에 따라 공급량을 조절하는 게 쉽진 않다. 가격이 급등하면 일반 상품처럼 바로 생산을 늘릴 수 없고, 반대로 가격이 폭락해도 생산량을 줄이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농산물 수급조절을 위한 중앙정부 차원의 컨트롤타워 역할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부는 여전히 손 놓고 있는 모습이다. 가격이 급등하면 가격안정이라는 이유로 채소 수입량만 늘려놓고, 가격이 폭락하면 또 다시 예산을 들여 산지폐기 위주의 단기 처방에 급급하고 있다. 매년 정기적으로 하는 농산물 수급 예측도 주무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와 통계청의 예상치가 엇갈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산지 폐기만으로 풍년의 역설을 막기에는 한계에 다다른 지 오래다. 단순히 재배면적 의향만 조사하는 것이 아닌 농산물 소비추세까지 함께 파악해 수급예측의 정확도를 높이는 노력이 중요하다. 초과 생산된 물량은 선매입해 시장격리하고, 가격이 안정되면 시장에 내놓는 공공수급제와 농가소득 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농산물 최저가격안정제 도입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체 작물의 10% 정도에만 적용 중인 채소가격안정제도 농민 눈높이에 맞춘 개선을 통해 품목과 농가 참여를 활성화해야 한다.

최근 채소 생산자단체들이 잇달아 서울로 상경해 대정부 투쟁을 했다. 농산물 가격폭락은 농업기반을 무너뜨리는 가장 큰 위험요인이자 농가 생존권이 달린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과거와 다른 농정을 펼친다고 약속한 바 있다. 이전 정권이 보여준 사후약방문식의 소극적인 대처가 아닌 근본적인 대책 마련으로 농가에게 더 이상의 실망감을 주지 않길 바란다.   

parkse@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