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년 전 현대중공업 본사인 울산공장을 둘러보면서 놀랐던 때가 떠오른다. 공장 안은 하나의 소도시와 같았다. 축구장 600개 이상이 들어설 수 있는 면적에는 집채만 한 크기의 선박 블록이 대형 트레일러에 실려 제자리를 찾아다녔고, 건조된 선박을 바다에 띄우는 시설인 ‘도크’마다 축구장 10개 이상은 족히 들어설 크기의 선박들이 출항을 기다리면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현장에 서있자니, 굳이 설명을 듣지 않고도 국내조선 호황을 몸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현대중공업이 세계시장을 선도한 배경에는 조선업 호황도 있었지만, 그보다 ‘단골’을 잘 붙잡아 놓은 까닭이 더 크다.
본사 관계자는 “일본은 크루즈 사업에 손을 대면서 조선업이 쇠퇴했고, 중국은 무섭게 추격하고 있지만 한국은 단골이 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단골 발주사를 붙잡으려면 신뢰감을 심어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수주 하나를 따내기 위한 직원들의 노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중국은 정부의 전폭적인 인력·기술 지원을 등에 업고 한국을 무섭게 따라 붙었고, 세계경기 불황을 기다린 듯 단가를 낮추면서 결국 한국 조선업을 추월했다. 한국은 이후 지난해 중국에 내준 세계 1위 자리를 탈환했지만, 중국은 정부의 무이자 선박 발주 자금지원 등을 내세워 다시 앞질렀다.
조선·해운 분석기관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중국은 올해 1분기 세계시장에서 발주된 선박 573만CGT(표준화물선 환산톤수·196척) 중 절반에 가까운 258만CGT(106척·점유율 45%)를 가져갔고, 한국은 162만CGT(35척·28%)로 2위로 밀렸다.
한국은 기술 신뢰를 바탕으로 이달부터 본격화하는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수주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미국 애너다코페트롤리엄은 아프리카 LNG 개발 프로젝트에 투입할 16척가량의 LNG선을 발주할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 2014년 러시아 야말반도 천연가스전 개발을 위한 ‘야말 프로젝트’ 2차 발주에는 최대 15척의 쇄빙 LNG선이 투입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국은 중국과 세계시장 선점을 두고 엎치락뒤치락 경쟁을 이어갈 것으로 보이지만, 기술우위 선박에 대한 발주사들의 신뢰는 여전할 것으로 점쳐지는 만큼 회복까지 시간은 점차 짧아질 공산이 크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대우조선해양과의 인수·합병(M&A)을 통한 기술 시너지를 낼 것이란 기대감마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현대중공업은 다시 ‘신뢰’를 강조하고 나섰다. 다만, 이번 대상은 발주사가 아닌 근로자들이다.
현대중공업은 21일 한영석·가삼현 공동 사장 명의로 담화문을 냈다. 골자는 단체협약 승계다.
공동 사장은 담화문에서 “회사는 단체협약을 변경할 이유도, 계획도 없을뿐더러 물적분할 이후 근로관계부터 근로조건, 복리후생까지 모두 지금과 동일하게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중공업은 물적분할(법인분할)에 반대해 파업 중인 노조를 상대로 단체협약 승계를 약속하면서 M&A에 대한 본격적인 설득에 나선 셈이다.
앞서 노조 측은 회사를 물적분할 할 경우, 현대중공업은 생산공장으로 전락하게 되고 앞으로 임금과 노동조건, 고용안정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공동 사장은 근로자들이 우려하는 부분에 마침표를 찍는 의미에서 단체협약 승계와 고용 안정을 약속했다. 이들은 노조가 내세운 물적분할 반대 명분이 사라진 만큼 노조의 적극적인 협력 기대한다는 당부의 말도 남겼다.
특히 공동 사장은 회사의 물적분할 후 울산에서 인력이 빠져나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둘러싼 노사 간 이견은 여전하지만, 현대중공업은 근로자들이 느낄 불안함을 없애겠다며 신뢰를 약속했다. 현대중공업이 세계시장에서 강조해온 ‘신뢰’라는 카드를 노조가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관건이다. 현대중공업 노사 간 합의와 소통이 세계 조선업을 다시 거머쥘 신호탄이 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