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독일의 장애인 관련 기사에서 “우리 없이 우리를 논하지 말라”는 주장을 봤다. 수많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당사자가 배제되거나 형식적으로 동원되는 일은 적지 않다. 수많은 정책 결정이 그렇게 이루어진다. 공식적으로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들,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그 결정에 권위를 부여한다.
당사자가 배제된 정책 결정은 당사자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와 더불어 살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참여 기회와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당사자의 권리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 없이 우리를 논하지 말라”는 주장은 대개의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강력한 항의이자, 자기 결정의 주체가 되겠다는 당사자의 결단을 담은 권리 선언일 것이다.
물론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각자의 권리 보장이라는 원칙과 거리가 멀다. 사회구성원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실질적 조건이 부재하다. 지극히 소수에게만 특권처럼 권한이 부여되어 있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유보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사회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사람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회 안에서 불만 없이 안정을 누리는 극소수 사람들과 사회 밖에서 날로 심해지는 격차를 경험하는 대다수의 사람들 사이의 분리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기존 사회의 규칙이 변화하지 않는 한, 20대 80의 사회에서 10대 90의 사회로, 1대 99의 사회로 빠르게 재편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사회에서 촛불 이후 당사자의 권리 주장이 강해지고 있다. 여성의 목소리, 청년의 목소리, 을들의 목소리가 기존 사회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기존 질서 속에서 반사회적인 태도로 매도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목소리는 기존의 질서에 파열음을 내고 있다.
촛불은 소멸하지 않고 다른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때론 기존 이해관계들 속에서 당사자의 목소리를 바로 소비하고 휘발시키는 일도 흔하다. 또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공허한 것이 되어버리는 일도 숱하다. 하지만 누군가가 바꾸어내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하면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변화가 시작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누구나 사회변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시대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변화를 현실로 만드는 일은 어렵다. 또한 변화의 가능성은 의사소통 기술의 발전 등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과정에서 여전히 소외되고 있다. 당사자들의 지속적 행동과 연대를 통해서만 이런 역설을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당사자주의는 의사결정을 당사자들이 독점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형식만 남은 민주주의를 당사자 참여를 통해 실질화하자는 주장일 것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사회에서 ‘적응’하거나 아니면 ‘배제’되는 강요된 선택지를 거부하고 새로운 선택이 가능한 다양하고 의미있는 기회들을 스스로 만들어내겠다는 자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사자주의는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권리 선언이다. 더 이상 내 삶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내가 소외되지 않는, 내 삶과 민주주의가 만날 수 있는 실질적 연결을 확장해보자는 주장이다. 그래서 “우리 없이 우리를 논하지 말라”는 주장은 지금 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다시 묻는 질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