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청년 관련 모임과 행사에 자주 가는 편이다. 가끔씩 분위기가 싸해지는 경우들을 보게 된다. 토론 사전 모임에서 나이를 묻고는 아주 대견하다고 하거나, 식사 자리에서 대학 졸업했는지 심지어는 결혼했는지를 묻는 ‘어른’들이 있다. 가끔씩은 자신의 자식과 비교를 하기도 하고, 하는 일을 듣고 묻지도 않는데 일에 대해 세세한 코치를 하기도 한다.
물론 관심을 갖고 조언을 하는 것은 나름 호의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토론자로 초대된 모임에서 사적인 질문을 하거나 가르치려드는 것은 청년들 입장에서는 자격을 박탈당하는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일들이다. ‘청년들 이야기 듣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태도, ‘이야기 듣고 내가 해결책을 줘야 한다’ 이런 식의 책임감은 이제 내려놓는 것이 좋다.
최근 정치권에서 난데없는 ‘청년 탓’을 하는 의원들 발언이 적지 않은 분노를 사고 있다. 또 청년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활용하는 의원들 행태도 보기 좋지는 않다. 20대가 교육을 받지 못해 사회의식이 부족한 듯 이야기하는 것이나, 청년 지지를 끌어내려고 갈등을 부추기고 편 가르기에 나선 듯한 발언들이 많다.
세대 간 의사소통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 사회 곳곳에 이런 인식과 태도들이 흘러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세대는 당연히 서로 다른 세대의 한계 내에 있다. 서로 탓할 일도 아니고, 서로 비교할 일도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서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도 필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잘해야 한다는 압박만 있고 뭔가 시도할 기회는 닫혀있는 사회에서 이해해보려는 노력도 이해받기는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해결의 첫 단추는 각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서로 이해하고 동일해지려는 힘겨운 노력보다 다른 세대의 개인들에게도 대등한 선택권과 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된다. 동등한 권리를 가진 주체라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대등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한 세대가 정의와 당위를 독점하려고 하면 할수록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견고한 구조가 각자가 원하는 삶을 수용할 수 없을 때, 변화는 불가피한 시대정신이 된다. 사회적 가치와 규범이 다시 정의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변화의 시기에는 사회적 대화가 더 활발해져야 한다. 서로의 권리에 기반한 논의의 장을 다양하게 마련하는 것, 이것이 기성세대가 갖는 책임 영역일지도 모른다.
서울시에서 ‘청년자치정부’를 시작한다고 한다. 그동안 선제적으로 청년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 온 성과를 직접민주주의 형식으로 좀 더 발전시키겠다는 선제적 조치이다. 청년과 행정이 공동으로 집행부서를 구성하고, 상설적인 청년시민의회를 구성해 실질적인 참여와 숙의 프로세스를 만들어나가게 된다. 이번 달 공식적 출범을 앞두고 있다.
청년자치정부 출범은 청년문제 해결 방식에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청년을 위해서(for youth)’가 아니라 ‘청년과 함께(with youth)라는 취지는 기존 행정의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가장 견고한 행정 영역에서 청년의 권리를 인정하고 권한을 부여하는 전환적 조치일 수 있다. 청년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면서 행정을 운영하는 새로운 행정혁신 실험.
그래서 나는 청년자치정부 출범을 축하한다. 청년자치정부가 과감한 혁신의 결단과 의지로 개인의 삶에 드리우는 우울한 전망을 걷어낼 수 있기를, 냉전의 유산과 개발주의의 후유증을 넘어 미래에 대한 논의를 멈추지 않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