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주변에 꽤 유명한 <느티나무도서관>이 있다. 그 도서관에 갔을 때, “이 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가슴이 뛰도록” 도서관을 운영하겠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이 도서관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후원과 주민들의 자원봉사로 운영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도 공공이 운영하는 공간과 달리 사람과 돈이 부족하겠지만, 사람들의 혼이 담긴 흔치 않은 도서관의 존재 자체가 지역 주민들에게는 상당한 자부심일 것이다.
나는 이런 시민공간들이 더 다양하고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동네에서 함께 모이고 이야기하고 대안을 찾아내지 않는 한, 위기로 치달아가는 삶을 구원할 방안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 영역에서 날로 진입 장벽은 높아져만 가고, 독점과 편중이 심각해지고 있다. 경쟁과 배제가 심화되고, 연결과 협력이 어려워지는 사회는 지속가능할 수가 없다.
우리 사회는 지난 30년 동안 정치적, 제도적 민주주의를 힘들게 만들어 왔다. 하지만 정치적, 제도적 민주주의는 약자들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고 내 삶과도 유리돼 있다. 시민적 토대 없는 민주주의는 매우 허약하다. 강한 민주주의는 시민사회 토대가 튼튼할 때 가능하다는 말에 수긍하면, 그 민주주의는 자치 원리에 기반한 시민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자치와 시민민주주의에 대해 여전히 비판적이다. 중앙집권제를 대놓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이유를 들어 실제로는 반대한다. 지역 의회가 주민자치를 실질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제도인데, 별도의 시민들의 권한이 또 필요한가? 시민들에게 실제 권한을 부여할 만큼 자치 역량이 성숙해져 있는가?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일들에서 자치가 비효율적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성을 가질 수 있는가? 등등.
생각해 보자. 선거라는 제도는 지역의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표성은 절차적인 것이지 내용적인 것이 아니다. 지역의 시민활동, 시민참여와 연결돼 있지 않은 대표성은 민주주의를 충족하지 않는 것이며, 시민의 통제가 가능하지 않은 대표성이란 사실상 민주주의에 미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자치와 직접 참여라는 시민적 토대는 훨씬 더 강조돼야 마땅하다.
또 하나, 현재의 역량 부족이나 효율성 결여 등의 이유는 시대착오적이다. 권한 부여 없이 역량은 성숙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스스로 조직하고 자치하는 경험 속에서 지혜는 축적되는 것이다. 추가하자면 다양한 시민의 일상을 획일적으로 틀짓는 것, 복잡한 현실 조건을 명확한 결정으로 단순화하는 것이 바로 관료적 비효율이다.
민주주의는 누군가가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과두적이고 독점적인 이해관계가 구조화되면 될수록, 민주주의는 취약해질 것이다. 권한을 대폭 분산시켜 사회적 신뢰를 높이는 것, 시민들의 일상 속에서 자주성을 확립해나가는 과정 속에서만 민주주의는 튼튼하게 자리잡을 수 있다.
주민자치회가 시작되고 있다. 몇 년동안 서울시에서 마을계획과 주민총회를 통해 만들어 온 주민참여가 주민자치회를 통해 본격화된다고 한다. 전국적으로도 이런 흐름은 확대되고 있다.
주민자치회는 지역의 일을 행정과 자치회가 분담하는 구조를 만들고, 자치와 참여의 통로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시민의 흐름, 혁신의 흐름을 묶어내 민주주의의 지역적, 시민적 토대를 강화시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물론 조건은 어렵고 과정 또한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시민, 자치, 참여가 과잉일수록 더 튼튼해진다는 확신 없이는 시대 흐름에 부응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민자치회의 미래가 시민민주주의의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