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개인은 어떤 존재인가? 주변에서 무력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되는 듯하다. 사회적으로는 ‘나도 억울하다’는 감정이 흘러넘치고 갈등과 혐오가 여과 없이 확산되고 있다. 한 개인들의 삶의 차원에서는 평생 대출 노예로 살거나 가족 부양과 책임감에 억눌려 스스로 삶을 결정할 여지가 사라지고 있다. 집을 사지 않고 살겠다거나 결혼을 하지 않고 내 삶을 즐기면 살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하지만 전통적 규범을 벗어난다고 해도 현실의 무게를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얼마 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24세의 청년이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졌다. 그는 사고를 당한지 5시간 만에 발견됐고, 사고 이후에도 별다른 개선 없이 공장은 가동되고 있다는 보도들이 잇달았다. 이 사건이 많은 분노를 불러일으킨 것은 한 개인이 있거나 없거나 아무 상관없는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2인1조 규칙을 지키거나 산업안전에 관한 법과 규칙이 있었지만, 인력수급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말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런 시스템에서 정부는 사실상 부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주 사소한 내 일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도 작은 일 하나 처리하려면 이런저런 약정에 동의해야 하고 내 데이터를 누군가에게 넘겨야 한다. 내 데이터의 남용 가능성을 우려하지만 데이터 수집에 동의하지 않으면 뭐하나 처리할 수 없다. 이미 거대한 시스템 속에 무력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책임이 아니어도 나쁜 일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알 수가 없다. 내 삶이 지켜지거나 존중된다고 느끼며 사는 가장 초보적인 권리가 현실에서 부정되는 것이다.
내 삶에 대한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감각, 나의 운명이 스스로의 결정과 관계가 없는 현실을 벗어나야 한다. 내 삶의 무력감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개인의 삶과 공적 삶 사이의 구분을 넘어서 작은 실천들을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 관심사를 나누는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들, 공동체 활동을 하는 모임들, 환경을 지키는 모임들, 미세먼지를 극복해보려는 시민모임 등은 다양한 모임들은 이런 일들을 한다. 개인의 삶과 연대 활동을 결합하는 공동체적인 개인주의, 연대적인 개인주의를 실천하는 모임들이다.
나아가 청년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여러 모임들도 있고, 미투를 계기로 여성의 삶을 지키려는 모임들도 있다. 또 ‘정치하는 엄마들’과 같이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활동들은 기존의 정치에 ‘아니오’라고 말하면서 삶과 정치, 당사자와 정치를 연결시켜 나가고 있다. 말하자면 기존 정치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이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면서 직접 정치에 나서는 경우들이다.
최근 미국 민주당 내에서는 ‘밀레니얼 세대’의 정치가들이 파격적인 논의들을 시작했다. 스스로 목소리를 대변할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새로운 정치가 만들어내는 반향이 크다. 대표적으로 오카시오 코르테즈의 정치를 ‘나로부터 시작하는 정치’, ‘나를 주어로 하는 정치’라고 해석한다. 스스로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기결정권의 정치가 시작되고 있고, 이런 변화는 새로운 정치를 위한 디딤돌을 놓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누구도 나를 위해 고민해주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는 이유다. 특히 젊은 청년들이 분노하고 있다. 사회적 기회구조, 정치적 기회구조를 확실히 열어주는 사회적 결단 없이 우리 사회는 어떤 사안도 동의나 합의를 이루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닫힌 정치 시스템을 열어야 한다. 모든 시민들이 ‘자기결정권을 위한 정치’에 나설 수 있는 정치개혁을 상상해야 할 때다.